중년단상
제주엔 바람이 분다.
비 예보가 있어 어제부터 비를 맞을 마음의 준비를 했었지만 세차게 부는 이 바람까지 예상하진 못했다.
매년 봄마다 늘상 그러했듯, 제주의 봄은 화려하고 따뜻하면서도 '고사리장마'라 불리는 긴긴 비로 추적거리고 눅진했다. '화무십일홍'의 전형적인 벚꽃은 만개한 그 아름다움에 취하자마자 며칠새 눈처럼 꽃잎이 흩날리더니 이내 연두빛 새싹과 시든 꽃대로 색감마저 얼룩져 버렸다. 화려함은 참으로 짧다. 꽃이나 사람이나.
그럼에도 이 갱년기 아짐은 사막에서 물을 찾듯 피어난 꽃들의 화려한 축제를 찾아 두리번거리고, 그 향기를 들이마시고, 향기에 취하고, 지는 꽃잎에 아쉬워하며 그렇게 또 한계절을 두팔벌려 깊이 받아들이고 다시 보낼 준비를 한다. 화살과도 같은 시간은 또다시 어김없이 그 계절도 빼앗아감을 알기 때문에.
올 봄은 꽃들과 함께 '호모데우스'에 빠져 지냈다.
출간된지 이미 몇년이 지났지만 최근에야 차분히 e북으로 정독했다. 워낙 '사피엔스'를 인상깊게 읽었었고 그 충격이 꽤 오래 갔기에 유발 하라리의 다음 출간소식을 기다리긴 했었다. 잠깐 들른 시내 서점에서 출간후 들춰볼 기회는 있었으나, 그때가 아마도 코로나가 시작된지 얼마 안된 시점이었고 부침이 심했던 자영업자로선 감내해야 할 이런저런 일들이 많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버둥거렸던 날들 사이로 시간은 휑하니 지나 있었던가 보았다.
'사피엔스'때도 마찬가지였지만_이전에 '사피엔스 패러독스'란 제목으로 글을 쓴 적이 있다.'
https://brunch.co.kr/@soccumi/22#comment
이번 '호모데우스'도 역시 충격과 놀람, 감탄과 비탄을 반복적으로 내뱉으며 읽기를 마쳤다.
사피엔스가 원시적 인간에서 현 시점까지의 인간을 사회적, 종교적, 역사적으로 분석했다면 '호모데우스'는 다시금 그 인간이 여타 다른 동물들과 차별화된 점은 무엇인지를 과학적, 종교적, 사회적으로 심도깊게 분석하고 지금 시대의 흐름과 향후 미래의 모습까지 예측하고 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참으로 해박하고 다양하고 색다르며 꽤나 재미가 있다. 집요하게 파고드는 유발 하라리의 학구열과 집념, 해박함과 학자적 고집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수 없었고.
인간에 대한 탐구는 다방면으로 흥미로웠으나 결과는 역시나 사피엔스 때처럼 회의적이다.
인간은 대단한 무엇이 아니라는 것. 다른 동물들과 크게 다를 것 없다는 것.
다만, 자기 필요에 의해 명분을 만들고 회유하며 대중을 선동할 수 있는 '연대의 힘'이 있다는 것.
기나긴 실험결과와 방대한 탐구의 궤적을 흝으며 내려온 이 결과 앞에서 사실 난, 무릎을 치며 쾌재를 불렀다.
"그래, 이거지."
참으로 명쾌하지 않은가?
내 맘같지 않은 너의 맘, 내가 알았던 정의와 합리적 사회의 모순들, 모든 악행은 결국 처절한 응징을 받을 것이라는 인과응보의 배신, 착하게 살면 복을 받는다던 어른들의 말씀에 대한 의구심.
이 나이까지 살아보니 이제껏 내가 당연한 줄 알았던 그 모든 명제들은 혼돈의 구렁텅이 속에서 하염없이 돌고 있는 드럼 세탁기를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구나.' 라고 느낄때면 '도대체 인간이란 뭘까?'란 궁금증이 탄식처럼 절로 나왔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나니 그동안 묵혔던 체증이 내려가는 느낌이랄까?
짐승이 아니기에 인간이기에 보다 신성한 그 무엇, 영혼이 주는 양심과 진심이 있으리라 믿었던 것 같다. 오죽하면 쳐맞아 죽어도 쌀법한 인간들에게 우리는 그러지 않는가?
'이런 짐승만도 못한 놈!'
그런데 인간은 그런 존재가 아니었더란 말이다.
그냥 여타 다른 많은 짐승 중에 하나였을 뿐이었단 거다. 그마저도 머지않을 미래에서 그 인간들은 사이보그에게 대체될 운명이며, 신을 내세운 종교 대신 데이터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데이터교를 섬기게 될 것이란 예측엔 비참하면서도 통쾌한 복수심마저 느껴졌다.
"그래, 그동안 인간들이 해온 것들이 있는데 말로가 좋겠냐고.
생태계를 파괴하고 지 욕심만 앞세워 싸우고 죽이고 그럼에도 역사란 이름으로 합리화시키고.
그래봐야 인간이 존재한 시간이 거시적으로 보면 길지도 않았구만 아주 분탕질을 해놓고 가는 거지."
SF 영화들에서 늘상 그려지듯이 어둡고 암담한 미래가 여지없이 예견되는 가운데에서도 난 왠지 모르게 몹시도 통쾌해져서 날아갈 것만 같아졌다.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이 사회, 국가, 종교, 교육.. 그 모든 것들에서 좀 자유로와진 기분이랄까?
어차피 인간이 다 저 필요에 의해 만들어 놓았던 것인데 왜 우리는 그 틀 안에 갇혀 절대적으로 벗어날수 없는 족쇄인냥 스스로를 옥좨며 몸부림을 쳤을까?
'사피엔스'때 못지않은 '호모데우스 패러독스'에 또 빠져버렸다.
그런데 그 병명이 싫지 않다. 이치와 흐름을 알고 나니 이 세상에 이해못할 것도 없을 것만 같아져서.
양희은 선생님은 아마도 이 모든 걸 이미 알고 계셨나 보다. 나 역시도 어느새 그분과 같은 말을 읊조려본다.
"그럴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