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고통

다시, 사랑_2

by 후룩쥔장

그해 봄은 유달리 화창했다.

다른 봄과 별다를 것 없던 날이었음에도 새삼 그렇게 느낀 것은 그 전까지 제대로 계절을 느낄 마음의 여유가 그녀에게 없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버스정류장 앞에 만개한 벚꽃과 목련, 이름모를 화사한 자잘한 꽃들을 보며 그녀는 봄이 이토록 아름다웠던가 새삼 감탄했다.


그녀에게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녀의 집은 이제 흑석동이 아닌 결혼 전 부모님과 함께 지냈던 안양이다. 출근시간 한참 전인 이른 새벽에 그녀는 여의도로 가는 전철을 탄다. 회사가 있는 여의도의 한 어학원에서 영어와 일어를 연강한 후 사무실로 출근한다. 회사가 끝나면 집 근처 헬스클럽에 가서 운동을 한다. 자꾸만 움추러드는 마음과 머릿 속을 어지럽히는 상념을 떨치기 위해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쓴다. 잠깐의 방심의 시간 속에 자꾸만 스며드는 외로움과 그리움을 떨치기 위해 더 바쁘게 움직인다.


'이번 주에 아이 보러 갔으면 해.

하루정도는 내가 데리고 와서 자고 데려다 줬으면 하는데, 일정 어떤지 답장 줘.'


받지 않는 전화의 재발신을 누르기 어색해 그녀는 남편에게 문자를 남겼다.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흑석동 그밤 이후 그녀의 사무실이 있는 여의도에서 만났었다. 남편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를 그녀에게 물어왔다. 그녀의 향후 거취가 궁금하다는 그 앞에서 그녀가 꺼낼 수 있는 말은 한 가지였다.

"그 여자 사랑하니? 둘이 정말 그런 관계였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을 애써 누르며 그녀는 더욱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고 대답을 기다렸다. 그녀의 질문에 그녀의 남편은 피식 웃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너는 어차피 믿지 않을 거잖아."

그녀는 웃는 남편의 옆모습을 보며 그 웃음이 참 비열하다고 느꼈다.

"집을 먼저 나간 건 너야. 더 이상 너를 잡을 생각도 없어. 아이는 내가 키워.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 "

그렇게 그는 여의도 한강변에 그녀를 내려둔 채 차를 타고 가버렸다.


흑석동에서 나온 그 밤 이후 그녀는 아이를 데려오지 않은 걸 후회했다. 하지만 몇 번을 생각해도 그 상황에서 아이까지 데리고 나올 정신이 있었을까는 스스로도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그렇게 아이와 인연이 끊어지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녀가 원하면 다시 데리고 올 수 있으리라 너무도 쉽게 생각했다. 무엇보다 그녀는 그녀의 남편을 믿지 않았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 기저귀라고는 한두번 갈아봤을까, 모유 수유를 하는 그녀 덕분에 한밤 중에 아이가 울어도 세상 모르게 코만 골며 잤던 사람이다. 아이에게 자상한 아빠가 아니었다. 어린이집에 다닌 후에도 일하는 그녀가 항상 발을 동동 구르며 하원시간에 맞춰 데려오고 씻기고 먹여야 했다.

그녀의 남편은 아이를 혼자 키울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아이를 데리고 오지 않은 건, 그만큼 그가 일찌감치 포기하고 그녀에게 구원을 요청할 거란 생각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혼을 하더라도 양육권과 친권을 가져와야 한다면 대화로 선선히 아이를 보내줄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조금만 버티면 아이를 부탁한다며 그녀에게 데리고 올 거라 그녀는 믿었다.


그럼에도 아이가 너무 보고 싶었다. 겉으로는 너무도 멀쩡하게 생활하고 있는 듯했지만 아이만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졌다. 함께 있으면서 못해 준 것만 생각이 났다. 키우면서 별 것 아닌 일로 나무라던 생각, 좀 더 많이 안아주고 보듬어주지 못한 일들만 생각났다. 가끔 혼이 나거나 제 풀에 서러워 울던 아이의 울음소리가 대낮에도 그녀의 귓가에 이명처럼 들려왔다. 길을 가다 마주치는 딸아이 또래 아이들을 보면 그녀의 눈은 금새 젖어들어 애써 고개를 돌려야 했다.


그 밤 이후 처음으로 아이를 보기 위해 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을 찾았다. 회사 업무가 끝나고 부랴부랴 갔지만 어느새 아이는 집에 갈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그녀가 반가운 마음으로 아이와 재회하는 순간, 그녀의 남편이 나타났다. 연락없이 찾아 온 그녀를 보는 그의 눈매가 매서웠다. 아이를 서둘러 재촉한 채 차에 태웠다. 그녀는 슬퍼하는 엄마의 모습을 아이가 보는 것이 싫어 애써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엄마가 늦었네. 다음에 우리 딸 보러 다시 올께. 잘 지내고 있어."

아이는 엄마의 부재를 궁금해할만도 하건만 아빠의 차에 실려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든 채 멀어졌다.

안양으로 돌아가는 그녀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가슴 속에서 돌덩이가 쿵하고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건 밝아 보였던 아이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또 서러워 그녀는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길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처음으로 인사드립니다.

사실, 제가 살면서 이런 공간의 식구가 될 줄은 몰랐네요.

아프네요. 아직 법적인 절차가 남아있습니다만 마음 정리는 끝났네요.
모두들 말하더라구요.쉽지는 않을거다.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려울 거다.
그렇더라구요. 무관심을 넘어선 미움과 분노.막판을 향해 치닫는 그 정점에서 정신병자가 되어가고 있다는 느낌, 떨칠 수가 없었더랬습니다.

저에게는 이제 5살된 딸아이가 있습니다.

다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위자료도 없으니 챙길 돈도 없고 집이니 주식이니 다 날렸으니 내 옷가지만 들고 내 몸만 덜렁 나오면 다 정리될꺼라 생각했죠. 영화보다도 더한 현실 속에서 그 밤의 기억은 한 조각의 필름으로 그대로 정지 상태로 제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네요.
잊고 싶어서 떨치고 싶어서 누워 애써 눈을 감아도 자꾸만 벌떡벌떡 심장이 역류하는 듯한 느낌, 분노.
제가 이런 모습이 되리라곤 저 자신이 한심스럽기도 했지만 어쨌든 우리는 함께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기에 오히려 잘 되었다 위안을 삼았습니다.

불과 3일이 흘렀네요. 아이가 많이 보고 싶어요.
제 아빠를 더 많이 따르고 더 많이 닮았고 엄마 품을 일찍 떠나 너무 빨리 커버린 아이.
하나도 아쉽지 않을거라, 천륜이라면 나중에라도 찾아올 거라, 커서는 엄마 맘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아빠한테 있는 것이 더 안정적일 거라, 다혈질인 나보다는 훨씬 더 안정된 분위기에서 살아갈 수 있을 거라, 그 모든걸 위안으로 삼고 데리고 와도 여건이 허락치 않는 걸, 아이를 보면서 아빠를 생각하면 미워할 걸, 화내지 않으려 해도 어느새 화내고 있는 내가 보일 걸 아무리 변명을 해 보아도 아이의 그 꼬물거리는 손과 귀여운 웃음, 통통한 엉덩이, 모든 걸 안다는 듯이 울던 제 엄마를 작은 손으로 감싸고 다독이던 내 딸아이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엄마없는 아이로 자라날 수 있을까?

제 한 몸도 간수 못하는 아빠란 인간이 과연 얼마나 오랫동안 보아줄 수 있을까?
어차피 부모와 함께 살 수는 없더라도 엄마와 있어야 하는게 아닐까?


아이가 보고 싶어 자꾸만 전, 약해지려는 제 마음을 저와 똑같은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친정엄마의 걱정어린 눈과 따뜻한 품을 파고 들면서도 제 마음은 자꾸만 딸아이에게 달려가고만 있습니다.
많이 힘이 드네요. 생각보다 훨씬 더, 훨씬 더 많이 아픕니다.

같은 처지에 있는 이혼한 여자들의 인터넷 공간을 찾아 그녀는 가입을 하고 그렇게 까페에서 그녀의 서러움을 쏟아냈다. 그 누구에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만 같았기에 그리고 슬픈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친정엄마를 실망시킬 수 없어 더욱 씩씩해져야 했기에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아픔을 건네고 위로받고 싶어 그녀는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에서 자판을 두드리며 조그맣게나마 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