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사랑_3
헤어지더라도 아이는 볼수 있게 해주겠노라던 그녀의 남편말을 믿고 그녀는 주말아침 아이를 만나기 위해 흑석동 집으로 향했다. 익숙한 언덕을 올라 대문을 열고 경비 아저씨께 눈인사를 하고 현관문을 열려는 순간 그녀는 자물쇠가 바뀌어 있음을 알았다. 아직 법적인 절차가 이뤄진 것이 아닌데 이런식으로 그녀를 내치는가 싶어 그녀는 적잖이 당황하고 화가 났다.
"오늘은 내가 바쁜 일이 있어 집에 없을거야. 다른 사람한테 얘기해놨으니까 얘기하면 아이 옷가지랑 건네줄거야. 아이 데리고 가서 안양에서 자고 내일 내가 데릴러 갈께."
아침에 아이를 데릴러 가겠다는 그녀의 문자에 그녀의 남편이 보낸 답장이었다.
현관의 초인종을 누르자 아이가 쪼르르 달려나왔고 처음 보는 아주머니가 아이의 옷이 담긴 쇼핑백을 그녀에게 건네줬다. 화장품이며 몇가지 아직 정리 못한 그녀의 짐들이 안방에 있었기에 그녀는 짐을 챙겨야겠다는 생각에 현관에 신발을 벗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그런 그녀를 보고 당황한 아주머니는 무슨 일이냐며 다급하게 그녀를 쫓아 올라왔다.
"아. 제 짐이 아직 있어서 챙겨가려구요. 걱정마세요. 안방에만 갈 거예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방에 있던 J가 달려나왔다.
"지금 남의 집에서 뭐하는 거예요? 여기가 아직도 당신 집인줄 알아? 당장 내려와."
계단을 오르던 그녀는 얼어붙 듯 멈춰섰다. 이런 상황을 그녀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J가 아직 이 집에 살고 있다 해서 그녀의 출입을 막을 수는 없었다. 엄연히 그녀는 안방 두칸에 대한 형식적이지만 계약서를 작성한 계약자 본인이었으며 계약이 해지되지 않는 한 그 여자 따위의 간섭 없이 내 집을 드나들 수 있는 권리를 가진 거주자였다. 파르르 떠는 J를 무시한 채 그녀는 안방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성큼 들어선 방 안의 가구는 그녀가 5년 전 결혼할 때 해 온 그대로였다. 퀸사이즈 침대와 열자 장롱, 같은 계열의 화장대와 책상. 그 밤 그녀가 나간 이후로 변한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미묘하게 감지되는 변화를 그녀는 눈치챘다. 화장대 위에 화장품들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고, 서랍에 고이 개켜져 있는 속옷들도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장롱에 가지런히 걸려져 있는 남편의 옷 반대편으로 다른 여인의 옷이 얌전히 정리되어 있었다.
얼어붙듯 서 있는 그녀의 뒤로 J가 허둥대며 뛰어들었다.
"여긴 이제 더 이상 당신 집 아니야. 딸년도 버리고 나간 년이 무슨 염치로 남의 집에 기어 들어와? 당장 안나가면 경찰에 신고할거야. 당장 나가."
발악하듯 소리치는 J의 소리가 귓가를 때리는데 '딸년도 버리고 나간 년'이란 소리에서 그녀도 이성을 잃었다.
"어떻게 너희들이 이럴수 있어? 아니라며? 내 오해라며? 그래, 그렇게도 급했니? 이혼서류에 도장도 찍기 전에 그렇게 급해서 이 방에 들어왔니? 내가 아직 법적으로 부인이야. 누굴 신고한다고? 신고해. "
"혼자 잘난척 하더니 이제 와서 왜 기어 들어와? 어차피 그 사람도 너랑 살 생각 없었어. 뭐? 나 때문에 니들이 갈라서? 니들은 어차피 그 전부터 갈라설 거였어. 울산 어머님도 나를 며느리로 인정하셨어. 당장 나가. 이년아"
손과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 서 있기가 힘들었다. 무너질 수 없다며 마주대고 악다구니를 썼지만 이미 이 집에서, 이 더러운 집에서 나가고 싶은 생각만이 가득했다. 일층에서 이 모든 소란을 듣고 있을 딸아이를 데리고 더 이상의 그악한 엄마의 모습을 보이기 전에 어서 이곳을 벗어나야만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다시는 그녀의 딸아이를 이런 곳에 보내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그녀는 다급하게 딸아이를 찾았다. 악다구니를 지르며 제풀에 발악하던 J는 아주머니에게 떠밀려 사라지고 있었다.
놀란 눈의 딸아이를 안고 그녀는 흑석동 골목을 걸어 내려왔다. 누가 아이를 뺏어갈까봐 빠른 걸음으로 꼭 안은 채 눈물을 흘리며 정신없이 그 골목길을 내려왔다.
"다시는, 다시는 너를 그 집에 보내지 않을거야. 엄마가 잘못했어. 이젠 엄마랑 사는거야. 다시는, 다시는 엄마 안 그럴께."
아이의 볼을 부비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택시를 잡아탔다. 그녀의 무릎에 누운 아이는 놀란 마음에 이내 잠이 들었고 창밖을 바라보며 그녀는 결심했다.
'다시는, 다시는 그 인간들에게 내 아이를 보내지 않을거야.'
"집에서 있었던 일 얘기 들었어. 딴 생각 하지 말고 얘 데리고 와. 아니 내가 데릴러 가. 그리고 당분간 얘도 만나지 마. 얘한테 안 좋아."
"너란 인간은 인간도 아니야. 지금 그게 나한테 할 소리냐? 아이는 절대 못 보내. 내가 잘못 생각했어. 그 여자한테 죽어도 안 보내. 내가 키울 거야."
"이래봤자 너한테 좋을 거 없어. 법적으로도 너가 유리할 거 하나도 없어. 그냥 얘 보내."
"미친 놈아. 그래 법으로 해. 너란 인간하곤 끝이지만 아이는 못 보내."
안양 집으로 아이를 데리고 온 후로 이틀이 지났다. 아이는 이제부터 엄마와 살거라는 얘기에 마냥 신나하며 놀기에 여념이 없었다. 쌍둥이 사촌들과 어울리다 밤에는 곤하게 잠들고 아침이 되면 그녀와 이곳저곳을 다니며 즐거워했다. 그녀에게는 그녀의 남편과의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나 혹독하고 험난한 싸움이 될지 그녀는 생각만해도 지치고 힘이 들었다. 그럼에도 절대 절대 보낼수 없다고, 보내지 않을 거라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 출발해서 안양가고 있어. 아파트에서 소란 피우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아이 데리고 내려 와. 나 무슨 짓 할지 몰라."
전화기를 붙잡은 그녀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성질나면 물불 가리지 않는 그녀의 남편이 어떤 짓을 할지 알수 없었다. 무엇보다 이곳은 그녀의 친정 부모님이 살고 계신 집이었고 그녀의 아버지가 일하는 회사의 사택이었다. 소란이 나면 두고두고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말 많은 곳이었으며 결코 조용히 지나갈 수 없는 복도형 아파트였다. 나이든 부모님께 갈라서겠다고 나와 얹혀있는 것도 못할 짓인데 전 남편이 들이닥쳐 소동을 피우는 일까지 감당하게 하는 불효를 저지를 수는 없었다. 떨리는 손을 잡고 그녀는 고심했다. 그녀의 불안한 눈동자가 그녀의 품에서 잠을 청하던 딸아이의 눈과 마주쳤다
"엄마, 왜 그래?"
"어떻하지? 아빠가 오고 있어. 어떻하지? 우리 딸 데릴러 아빠가 지금 오고 있대."
"싫어. 나 엄마랑 살 거야. 엄마가 이제 엄마랑 사는 거라고 했잖아. 여기 사는 거라고 했잖아."
"그래. 그렇지. 그래, 우리 딸 걱정 말고 자자."
불안해하던 아이는 금새 그녀의 품 속에서 잠이 들었다. 잠든 아이를 품에 안은 채 그녀는 또다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앞에 놓인 전화기가 무서웠다. 이 순간이 여기서 멈추기를 바랬다.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들에게 내 아이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아이와 사라지고 싶었다.
"아파트 주차장이야. 올라가기 전에 얼른 데리고 나와. "
이미 더 버텨봐야 소용 없으리란 걸 그녀는 알았다. 그녀가 고집을 피우면 어떤 사건이 벌어질지 그녀는 눈앞에 그려지는 것만 같았다.
"엄마가 미안해. 정말 미안해. 오늘만, 오늘만 보낼께. 우리딸, 엄마가 꼭 데릴러 갈께. 그때까지만, 그때까지만 기다려 줘. 금방 갈께."
잠든 아이를 안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주차장에 서 있는 그의 차까지의 거리가 천리처럼 느껴졌다. 마음은 자꾸 뒷걸음질치는데 몸은 차를 향하고 있었다. 그녀와 아이를 본 그녀의 남편은 말없이 뒷문을 열고 아이를 안아 뒷좌석에 눕혔다. 그리고 그의 차는 쌩하니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멀어지는 차를 보면서 그녀는 무너졌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잡고 집으로 올라와 침대 위로 쓰러졌다.
상처입은 짐승처럼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끄윽끄윽 울음이 물려나왔다. 너무 아파 가슴을 주먹으로 쳤다. 치고 또 치고 바닥에 웅크린 채 '끄억끄억' 짐승처럼 울었다.
그때 그녀는 사람이 너무 슬프게 울면 짐승의 소리가 난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 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별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