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사랑_7
이제는 정말 간절히 바랍니다.
사업을 하면 망할 것이요.
회사를 들어가게 되면 쫓겨날 것이오.
여자가 있다면 곧 떠나게 될 것이다.
분만 대기실 벽의 시계는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초저녁에 진통을 느끼고 친정엄마와 함께 택시를 타고 와 병원에 입원한 그녀가 분만 대기실에서 힘겹게 고통과 씨름하고 있었다.
"초산이라 시간이 한참 걸릴 수 있어요. 아이 머리가 보여야 분만실로 이동합니다."
너무도 덤덤한 간호사는 주기적으로 그녀의 혈압과 체온을 재고 자궁이 벌어진 정도를 살펴본 후 돌아갔다. 곁에서 그녀의 다리를 주무르던 그녀의 친정엄마는 입술이 마르고 당신 딸의 진통이 올 때마다 허둥대며 딸보다 더욱 아파했다.
"엄마, 밖에 나가서 좀 쉬고 와요. 이 사람 있잖아. 무슨 일 있으면 부를께. 이 사람 들여보내 줘."
괜찮다고 하는 친정엄마를 그녀는 고집스럽게 밖으로 내보냈다. 밖에서 기다리던 그녀의 남편이 대기실로 들어왔다.
"괜찮아? 기분이 어떤데? 많이 힘들어?"
"그냥 아직까지는 견딜만한데. 아.. 또 진통이 온다. 아.. 후후후후."
"왜 그래? 숨을 왜 그렇게 쉬어? 숨쉬기 힘든 거야?"
"오빠, 조용히 좀 해. 라마즈 호흡법이야. 이렇게 하는 거래. 지난번 교육때 배웠어."
"아이구 깜짝이야. 야 근데 나는 실감이 안 난다. 아무래도 애가 밖으로 나와야 실감날 것 같아. 아가야, 이제 엄마 그만 힘들게 하고 나오자. 이 아빠 심심하다."
"오빠, 또 진통 와. 물 마시고 싶어. 너무 목이 말라. 물 한모금만 주면 안돼?"
"안 된대. 좀만 참아. 끝나면 물 실컷 마실수 있어. 또 먹고 싶은건 없어? 끝나면 뭐 사줄까? 다 말해. 다 사줄께."
"수박이, 수박이 너무 먹고 싶어. 아주 큰 수박으로. 나 혼자 한 통 다 먹을 수 있을거 같애"
"그래그래, 수박 사 줄께. 한 통 말고 두 통 사줄께. 어때? 수박 먹을 생각하니까 막 힘이 나지?"
"하하. 그런데 오빠, 나 점점 너무 힘들어. 자꾸 잠도 와. 엄마 좀 불러줘."
"그래? 그래도 어머님이 와 계신 게 낫지? 난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어머님 불러올께. 나 밖에서 기다린다."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 온 그녀의 친정 엄마는 점점 더해지는 그녀의 진통 속에서 차라리 내 배가 아픈게 낫다며 그녀를 차마 똑바로 보지 못했다. 그저 바쁘게 잠들면 안 된다며 까무룩 잠들려는 그녀를 흔들어 깨우고 그녀의 바싹 마른 입술에 젖은 수건을 축여주었다. 아이의 머리가 보이기 시작하자 그녀는 분만실로 옮겨졌고 고통으로 세상이 노오랗게 보이는 순간 힘찬 아기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시계는 새벽 2시 15분을 향하고 있었고, 밖에서는 TV로 월드컵 중계를 보는 이들의 함성소리가 들렸다.
오늘, 딸아이 생일이다.
지난밤 2시 넘어 잠들면서 정확히 4년 전 오늘, 새벽 2시 15분 딸아이를 낳았던 기억을 그녀는 떠올렸다. 당분간 딸아이를 보지 않으려 했지만 생일인데 얼굴이라도 보고 선물이라도 사 주고 싶었다. 며칠 전부터 여러가지 고민 끝에 그녀는 아이 어린이집으로 가겠노라고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문자에 답은 없었다. 기다리다 지친 그녀는 딸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에 전화를 했다.
딸아이는 어린이집에 오지 않았다고 했다. 어린이집에서는 딸아이가 생일인 것도 모르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히 잘 나오던 아이였고 아픈거 같지는 않았다는데 오늘 갑자기 연락도 없이 어린이집에 오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는 황당했고 화가 났다. 그냥 알리지 않고 다녀올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아이를 데리고 있는 사람을 생각해서 심사숙고 끝에 문자로 알렸던 것이다. 아이를 보여주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면 그녀에게 미리 알려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싫으면 싫다고 문자 하나 보내주면 될 일이었다. 화가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말 못할 사정이 있었나 걱정이 되어 그녀는 그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핸드폰은 꺼져 있었다. 기가 막히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라는 존재가 그렇게 두려운 존재였던가라는 생각까지 들어 어이가 없었다. 전화올까봐 두려울 정도로, 잠깐 얼굴보는 것도 싫을 정도로 그녀는 이제 그런 존재가 되었나 싶어 서러움에 또 눈물이 났다.
오늘은 유난히도 딸아이 생각이 많이 나서 정말 잠시나마 그녀는 그런 생각까지 했다.
'다 접고 내가 들어가 버릴까? 다시 시작하자 해볼까? 걱정거리, 그 여자관계까지도 다 접고 아이만 생각해서, 딸아이 매일 볼수 있다는 것만 고마워하면서, 정말 바보같은 모습으로, 애정이 없더라도, 가정'이라는 울타리는 유지해주며, 그렇게 살아볼까? 다 같이 그냥 함께 살자 해 볼까?'
말도 되지 않는 생각에 그녀는 실소를 흘렸다. 그런 생각을 하는 그녀가 미쳤구나 싶었다. 아이를 낳은 엄마라는 책임감과 그리움 때문에, 딸아이의 생일을 지나치지 못하고 보고자 한 마음 때문에 그녀가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가혹했다. 그럼에도 벌어진 현실 앞에서 그녀는 받아들여야 했다. 그저 참담했다.
어느 토요일이었다.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늘 아이 보여줄께. 재우는 건 안돼. 6시까지 데리고 와야 해. 갈곳이 있어. 늦으면 안돼."
인심쓰듯 말하는 그 말투가 너무 역겨웠지만 그녀는 갑작스런 데이트에 초대받은 것처럼 고마운 마음이 먼저였다. 최근 두 달 넘게 아이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허겁지겁 준비를 하고, 헐레벌떡 비오는 거리를 달려 버스를 두번 갈아타고 예전 집 앞 버스정류장으로 가서 아이를 기다렸다. 설레는 마음으로 아이와 4시간 동안 무얼할까를 고심했다. 그 어떤 남자친구와도 그렇게 애타게 하루를 계획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4시간이 전부였으니까.
딸아이가 아빠 손에 이끌려 모습을 보였다. 오랜만에 본 아이는 여전히 마른 몸에 머리는 파마를 하고 있었다. '엄마'하고 와서 안길때만 해도 그녀는 정말 꿈만 같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었다. 거리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고 그녀는 운전면허증도 없는 뚜벅이 신세였다. 그녀는 아이를 데리고 일단 버스를 탔다. 가까운 고속터미널로 가서 영화관으로 향했다. 비 오는 주말 영화관은 모두 만석이었다. 할 수 없이 그녀는 다시 아이와 택시를 타고 압구정으로 가서 비를 맞으며 영화관까지 걸었다. 다행히도 아이가 볼 수 있는 디즈니 영화티켓을 끊을 수 있었다. 팝콘을 사들고 어두운 내부로 들어가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녀는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팝콘을 먹이고 목이 마를까 콜라에 빨대를 꽂아 먹이며 아이를 꼭 끌어안았다. 영화가 상영되고 절반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고모, 고모한테 가야 해."
그녀는 순간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아이에게 고모는 그 여자, J를 지칭하는 단어였다. 그들은 아이에게 그래도 아직 엄마라고 부르게 할 자신은 없었던지 언젠가부터 그 여자는 아이의 고모가 되어 있었다. 친고모가 아니라 할지라도 고모라 불리는 여자와 한 방에서 자는 아빠라니 그녀는 그들이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는 인간들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이는 지금 이 곳에서 그 여자를 찾고 있는 거였다. 그녀의 무릎 위에서.
"고모가 보고 싶어. 일찍 가기로 약속했어. 빨리 가야 해. 아빠랑 기다릴거야."
눈물이 앞을 가려서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충격과 아이에 대한 배신감으로 속이 쓰렸다. 결국 아이는 영화가 끝나기도 전에 그녀를 재촉했고 그녀는 참담한 기분으로 택시를 타고 약속장소인 버스정류장 앞에서 내렸다. 그녀의 연락을 받은 그의 차가 정류장을 향해 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그 여자가 당당하게 앉아 아이를 돌려주고 뒤돌아서 걸어가는 그녀의 초라한 모습을 쏘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를 태우고 그녀 앞에서 쌩하니 멀어져가는 그들을 보며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녀는 걸을 힘이 다 빠져버려서 버스 정류장 앞 이층에 있는 낡은 까페에 들어가 줄담배만 피웠다. 주문한 커피는 입에 대지도 않은 채 담배 한 갑을 앞에 두고 피고 피고 또 폈다. 한 까치로는 아무 느낌이 없어 차라리 그 담배 한 갑을 몽땅 입에 다 쑤셔넣고 한꺼번에 불을 붙인채 함께 타 버리고 싶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비오는 주말, 흑석동의 이층 까페에는 담배를 피우는 그녀와 시간의 정적만이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