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향한 저주 (2)

다시, 사랑_8

by 후룩쥔장

흑석동 집을 나온지 오개월이 지났다.

그녀의 시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법적으로 헤어졌으니 더 이상은 그녀의 시어머니가 아니었지만, 그녀는 한 때 시어머니였던 분에게 항상 죄송한 마음과 연민을 갖고 있었다. 너무 억울하고 슬픈 날에는 마땅히 하소연할 곳이 없어 울산에 계신 시어머니에게 전화를 걸기도 했다. 한때 막내 며느리였던 여인의 한숨을 수화기 너머로 들으며 그 분 또한 미안한 마음과 안스러움에 눈물을 흘리셨다. 그리고 그녀가 잘 살기를 바랄뿐이라고 하셨다.


오랜만에 전화를 한 그 분은 새로운 소식을 그녀에게 전했다. 오는 19일, 그녀가 살던 흑석동 집이 경매로 넘어가니 법원에 가서 배당금을 찾으라는 거였다. 경매니 배당이니 그녀에게도 낯선 용어들을 나이 든 어른이 의미를 알고 전하시는 걸까마는 그녀는 일단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다고 했다.

분명 그녀의 전남편이 시킨 일이었을 것이다. 먼저 살던 흑석동은 안방과 이어진 방 두칸에 대해 전세권을 설정하고 들어간 곳이었다. 전세 보증금을 따로 준 것은 아니었으나 회사에서 어차피 경매로 넘어갈 집이기 때문에 여러 세입자들에게 미리 배당을 위해 전세권을 설정했던 듯했다. 당시 워낙 다양한 사업에 연관되어 있었던 그녀의 전남편으로서는 여기저기 벌려놓은 일들로 본인의 이름 석자를 지키기 힘든 상황이었고, 따라서 당시 부인이었던 그녀의 이름으로 계약서를 썼던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그들의 관계가 험악해지기 전 아직은 그들의 장및빛 미래를 얘기하던 때, 여의도로 출근하던 그녀를 그의 차로 태워주며 그는 그녀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흑석동 집 계약서야. 계약은 니 이름으로 했어. 금액은 얼마 안 되지만 너가 갖고 있는게 나을 거 같아서. 잘 갖고 있어. 나중에 경매 넘어가면 그 돈 받을 수 있을거야."

그리고 그 집이 드디어 경매로 넘어간 것이다. 그녀는 망설임 끝에 오랜만에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감정없는 목소리로 그는 그 돈은 네 돈이니 찾아가라고 했다. 액수는 크지 않았지만 그녀는 기뻤다. 무엇보다 항상 어떤 작은 일에도 한번을 순순히 넘어가 본 적이 없는 그와 싸우지 않아도 되는 것이 기뻤고 예기치 않던 목돈이 생긴다는 사실에도 기뻤다. 얼마라도 받을 수 있다면 그녀는 딸아이를 데려올 수 있겠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그리고 당장은 아이의 보육을 위해서라도 부모님께 얹혀 살아야 하니 그 돈은 아이를 위해 소중히 저축해두리라 생각했다.


경매에 대한 상식이 부족했던 그녀는 법원에 절차를 문의했다. 경매로 넘어간 집에 살았지만 그전까지 경매라는 것에 전혀 관심도 없었고 알려고 하지도 않던 그녀였다. 사건번호를 들은 법원의 담당자는 의아한 듯 말했다.

"정해진 날짜에 법원에 오셔서 배당신청을 하시면 돼요. 물건이 낙찰되기 전에 신청을 하셔야 은행으로부터 배당을 받으실 수 있어요. 그런데 이 물건 이미 낙찰됐어요. 계약서가 있다해도 낙찰되면 신청하셔도 힘들어요. 법원에서 해당주소로 수십번 배당신청하라는 통지가 갔을 텐데요?"

전화를 끊고 그녀는 헛웃음밖에 나질 않았다. 도대체 그녀를 얼마나 얕잡아 봤으면 이런 식으로 사람을 우롱하는 건지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분노를 넘어선 오기가 생겼다. 인터넷을 통해 경매상식을 공부하고 관련한 판례를 뒤졌다. 근처 부동산에 가서 해당사건 번호를 알려주고 자문도 구했다. 법원경매 사이트를 통해 물건을 검색하던 부동산 컨설턴트는 말했다.

"신건이네요. 보통 신건은 바로 낙찰이 잘 안되는데. 집이 좋은 건가 봐요? 아무리 좋아도 바로 낙찰된 건 좀 특이한 경우네요. 금액도 있는데."


법원 경매장은 시장터를 방불케 했다.

난생 처음 방문해 보는 그 곳은 법원이라는 이미지가 주는 근엄함, 엄숙함 따위와는 동떨어진 공급에 대한 과다수요로 인해 활기가 넘치고 북적거렸다. 갓난아기를 업고 나온 애기엄마도 보였다. 다들 경매물건을 보며 분석하기에 바빴고 서로의 눈치를 보며 낙찰금액을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배당신청을 넣고 있는 그녀 옆으로 나이 든 남자가 다가와 접수증을 내밀었다. 무심코 서류의 주소를 본 그녀는 그녀가 써낸 주소와 같은 주소임에 깜짝 놀랐다. 그녀는 순간 직감적으로 그 남자를 알아봤다. 전 남편 회사 사장의 아버지이자 지금 그와 함께 살고 있는 그 여자의 아버지. 어찌보면 전남편이 현재 장인어른으로 모시고 있을 관계. 접수자의 성이 그 여자의 성과 일치하는 것과 남자의 옆얼굴의 윤곽에서 그 여자의 모습이 어른거리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확신을 더욱 굳힐 수 있었다

"장사장님 아버님 되시죠?"

"누구신지?"

"그 집에 살고 있는 Y팀장 부인이었던 사람이예요."

순간 남자의 눈가에 스치는 복잡한 표정을 그녀는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화제를 돌려 배당이 될 것 같느냐 물었고 남자는 본인은 아는 것이 없다며 말끝을 흐렸다. 각자의 볼일이 끝나 법원을 떠나는 자리에서 그녀는 그 남자를 찾아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

뒤돌아 나오는 그녀의 등 뒤로 남자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녀는 여전히 당당하다는 걸 온 몸으로 알리고 싶어 허리를 더욱 곧추세우고 힘차게 발을 내딛었다. 철저히 무시해 주고 싶었다. 그와 그의 여자, 그리고 관련된 모든 이들을.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배당금에 대한 판결날짜가 왔다고 했다. 법원에 가야하는데, 계약자가 그녀이므로 그녀가 가야 한다고 했다. 필요한 몇가지 서류를 위해 그녀는 전남편을 만났다.
근 4, 5개월만이었다. 그녀는 왠지 모르게 설레었다.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아이가 그리워 재결합에 대해 혼자서 상상해 보던 요즘이었다. 그녀의 회사가 있는 여의도로 그가 왔다.

회사 건물 앞에서 그를 마주한 그녀는 깨달았다. 그들은 다시 함께 살 수 없다고. 검정 가죽 자켓에 검정 썬글라스를 쓰고 나타난 그는 회사 앞에서 담배를 꼬나물고 말했다.

"배당금이 얼마 나올지는 몰라. 늦게 신청해서 다 나오긴 힘들거야. 500이상은 절대 못줘. 계좌번호 줄 테니까 내 통장으로 나머지 금액 입금시켜."

그녀는 순간 그녀의 귀를 의심했다. 기가 막혔다. 그 돈은 그녀의 것이니 그녀가 알아서 찾아가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이 돈 앞에서 치사하게 구는 모습하며, 부탁해야 할 입장에서도 너무도 거만하게 그의 계좌로 입금시키라는 그의 고압적인 그 태도가 어이가 없었다. 왜 내가 너에게 돈을 줘야 하며, 그 돈이 네 돈이냐고 따지는데는 오만 정이 다 떨어졌다. 게다가 그 돈은 울산에서 지낼 새 집의 보증금으로 써야 한다고 했다. 그 돈을 믿고 이미 계약까지 마친 상태라 그 돈이 없으면 곤란해진다고 했다.


그에 대한 경멸감을 억누르며 그녀는 얘기했다.

"아이는 돌려줘. 이제는 내가 키울 수 있어. 울산에 있다며? 울산보다는 여기가 나을거야. 예전보다 내 상황도 나아졌어. 이제 나 차도 생겼어. 어린이집에 맡겨도 차가 있어서 빨리 데려올 수 있어. 나한테 보내줘. 내가 키우는게 낫잖아."

그는 싸늘하게 웃으며 담배를 비벼껐다.

"이미 늦었어. 다 끝난 얘기야. 그 얘긴 그만해. 넌 그런말 할 자격 없어."
"그럼 나도 당신에게 한 푼도 줄 수 없어. 당신도 늦었어. 난 하나도 주지 않을 거야."
그녀는 파르르 떠는 분노에 찬 그의 눈빛을 선글라스 속에서 보았다. 냉기가 흐르고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여차하면 그는 한 대 칠 것처럼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회사 앞이라는 것이 불안해서 그녀는 다시 생각해 본 후에 전화하겠다며 그에게서 돌아섰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그녀의 두 다리가 후들거리고 가슴이 벌떡였다. 그녀는 또다시 분노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너같은 놈에게 한 푼도 줄수 없어.'


다음날 법원으로 향하는 전철 안에서 그녀는 심한 두려움을 느꼈다. 그 사람과 그 여자의 측근들이 각목이라도 들고 법원 대기실에서 기다릴 것만 같았다. 돈을 빼앗기고 각목으로 얻어맞은 채, 대기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그녀의 모습이 자꾸만 연상되었다.
법원에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북적이는 사람들 속에서 지난번 배당신청 때 만났던 그 여자의 아버지가 보였다. 사건번호가 호명되고 배당신청을 한 임차인들이 호명되어 앞으로 나갔다. 그들 앞에서 판사는 선언했다.
"해당 사건은 배당신청일이 지난 후에 임차인들의 배당신청이 이뤄진 관계로 임차인 모두에게 배당금은 없습니다. "

순간, 그녀는 그녀의 눈 앞에서 광명이 내려비치는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이 정리되는 기분, 결국 욕심은 부질 없는 것이며 모두의 분란을 막기 위해 모두에게는 아무 것도 돌아가지 않는 것, 그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하늘이 알려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거짓으로 등록해 놓은 임차인들, 전 회사 사장의 측근들의 어이 없어하는 표정을 뒤로한 채, 이의소송을 제기할 사람들은 따로 남아 신청해달라는 담당자의 말을 등 뒤로 흘려버리며 그녀는 당당하게 법원을 걸어나왔다. 썰렁한 법원에 또각또각 구둣소리를 울리면서.


법원을 걸어나오는 그녀의 입가에 자꾸만 웃음이 번졌다. 몸이 너무 가벼워져 날아갈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마치 새로 태어난 기분이었다. 지난번 법원을 찾아 이혼수속을 밟고 나올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만큼 홀가분했다. 그만큼 미련이 없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여의도로 향하는 올림픽대로에서는 창문을 한껏 열고 불어오는 강바람을 가슴깊이 들이켰다. 열려진 창문 사이로 손을 뻗어 부드러운 바람을 느껴보기도 했다.
그렇게 홀가분하게 돌아와 회사건물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의 전남편이었다. 긴장한 듯한 전남편의 음성은 그녀가 배당 받은 돈의 액수를 묻고 있었다. 아직 그의 지인들로부터 소식을 전해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나도 없어. 배당신청이 늦어 아무도 받지 못했어. 그리고 이의신청은 하지 않았어. 당신도 나도 가진 건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 이제 그만 전화해."

믿을 수 없어하는 그의 음성을 들으며 그녀는 매몰차게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모든 걸 정리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시작한 다음날 아침, 그에게서 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

이제 정말 끝인 것 같다. 너란 사람이 그렇게 어리석을지 몰랐다.

아무리 너에게 내가 죽일 놈이었다 해도, 이런 식으로 나와 아이를 빈털털이로 만든 너를 나는 용서할 수가 없다.이 걸로 너가 아이를 보는 것에도 의사가 없는 걸로 이해하겠어. 너는 나뿐만 아니라 이제 니 딸과의 인연을 끊은 거야. 이제 정말 모든 악연을 끊는다. 더이상 연락하지 마라.


메일함에서 그의 메일을 확인하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읽어내려가던 그녀의 마음이 무너졌다. 그녀의 가슴에 돌덩이가 내려앉았다. 언제나 불리할 때면 아이를 볼모로 그녀에게 상처를 주는 그를 이제는 정말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메일을 읽었지만 그녀는 아무런 답장을 하지 않았다. 그 어떤 원망도 저주도 변명도 무의미했다. 악연의 끝은 그녀도 바라던 바였다. 그리고 아이 문제는 그녀의 저주대로라면 결국 그녀에게 오게 되어 있었다. 시월의 마지막날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