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사랑_9
며칠 전이었다. 그녀의 꿈에 딸아이가 보였다. 딸아이는 제 아빠와 함께 있었다.
반가움에 다가가는 그녀를 향해 그가 말했다.
"미국으로 떠나. 아이와 함께. "
"안돼. 못 가. 아이가 너무 어려. 가려면 당신 혼자 가. 아이는 안돼."
"너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아이 문제는 내가 결정해. "
"그러지 마. 너무 어려. 정 가야하는 거라면 당신이 먼저 가서 적응할때까지 나한테 맡겨줘. 나중에 보내줄께. 정말로 약속해."
그녀는 그에게 사정하고 있었다. 이렇게 가끔 보는 것도 힘든데 멀리 떠나버리면 영영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며 매달렸다. 지금 아이를 그와 함께 미국으로 보낼 순 없다고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아이를 두고 가도록 해야 한다고. 그녀의 부탁에도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한 얼굴로 아이와 함께 그녀 앞에 서 있었다.
꿈이었다. 그녀는 꿈에서 깨고도 한참을 멍하니 천장만 바라봤다.
너무 안간힘을 쓴 탓인지 꿈에서 깨어난 후에도 온몸이 욱씬거렸다. 너무 생생한 꿈이라 걱정이 됐다. 꿈속의 아이 얼굴이 자세히 기억나진 않았지만 아이에게 안 좋은 일이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가 되었다. 며칠 전 핸드폰이 물이 빠져 고장이라며 연락이 힘들 듯하다는 그의 메일이 있었기에 그녀는 전화를 단념하고 그에게 메일을 보냈다. 꿈에 아이가 보였는데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된다고. 그에게 메일을 쓰면서도 그녀는 그의 메일이 잘 살고 있는 그들에게 언짢음을 주는 건 아닌지 조심스러웠다. 그에게서 짤막한 답신이 왔다.
갑자기 이사를 하게 됐어. 당분간 울산에 가 있을거야.
그렇지 않아도 연락하려 했어. 당신이 두고 간 짐을 보낼께. 받을 주소를 메일로 알려줘.
그의 답신을 확인한 그녀는 당황했다. 물론 집이 낙찰되었다는 소식에 이사를 할 거라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울산행은 예상치 못했었다. 그는 이제 혼자가 아니었다. 딸아이와 더불어 그 여자와 함께일 터였다.
그 여자에게 울산은 낯선 곳일 터였고 한번 다녀오는 것도 아니고 거주지를 울산으로 옮긴다는 건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터였다. 또한 그에게 서울이란 그렇게 대박을 꿈꾸며 버틴 곳이 아니던가. 성공하기 전까진 내려가지 않을 거라고 말했던 그가 울산으로 가기로 했다는 건 결국 지난 세월에 백기를 들고 패잔병의 모습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과 다름이 없다는 걸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며 그녀는 슬퍼졌다. 한때 사랑했고 함께 살았던 사람으로서 그가 안스럽게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그보다는 당장 딸아이가 걱정됐다. 상황이 얼마나 좋지 않은 건지는 알수 없지만, 만약 심각한 거라면 아이는 엄마인 그녀에게 맡겨야 마땅했다. 분명 가까운 곳에 친엄마가 있는데 딸아이를 낯선 울산까지 보낼 수는 없었다.
그녀는 울산에 계신 시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어머니는 아무 것도 모르고 계셨다. 처음 듣는 얘기라 했다.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오히려 그녀에게 반문했다. 당신 집에 오는 거라면 아무 연락이 없었을 리가 없다 하셨다. 그녀가 잘못 알고 있는 걸 거라 하셨다.
전화를 끊은 그녀의 가슴 속에 다시금 천불이 났다. 그들은 또 그렇게 그녀를 기만한 거였다. 울산이 아니었던 거다. 그들은 서울 안, 멀어야 경기도일 것이다. 다만, 그녀가 아는 것이 싫어, 그녀의 연락이 싫어 다른 이야기를 지어낸 거다. 그리고 또 그녀는 바보같이 그들의 작전에 놀아나 그를 안스러워하고 잠시나마 불쌍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녀는 그동안 흑석동 집 앞에 가서 아이를 기다린 적도, 염탐하듯 가서 그들의 집을 들여다 본 적도 없었다. 그 근처만 지나가도 마음이 너무나 아파 일부러 그쪽과는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고 외면해 왔다. 다만, 아이가 어디에 있고 어떤 환경에 있는지 정도는 알고 있어야 안심이 되기에 그저 사는 곳에 대한 정보만을 원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마저도 그 위안마저도 그녀에게서 앗아가려는 것이다.
며칠 후, 그녀에게 다시 온 그의 메일은 그녀를 더욱 분노케 했다.
주말에 짐을 보낼 거야. 짐이 좀 많아. 가구와 전자제품. 당신 물건은 남김없이 다 갈거야.
화물차 기사분께 당신 전화번호를 줬어. 전화기 꺼놓지 말고. 요금은 착불이야.
온다는 물건은 그녀가 결혼할 때 해 간 신혼살림들이었다. 장롱과 침대, 화장대와 세탁기, 냉장고, TV등이었다. 그녀가 흑석동 집에서 그녀의 옷가지만 싸들고 나온 이후로 그들은 그 물건을 모두 썼다. 그녀가 해 간 침대에서 그 여자와 한 이불을 덮었고, 그녀의 장롱 안에 그들의 옷을 넣었으며, 그녀가 두고 온 냉장고에서 음식을 꺼내어 해 먹고, 그녀의 친정엄마의 고집으로 이불 빨래까지 가능하다는 대용량 세탁기에서 그들의 빨래를 했다. 하다 못해 그녀는 결혼할 때 받았던 패물 어느 하나도 가지고 나온 것이 없었다. 이미 그것들은 그녀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필요할 때 실컷 써 놓고 이제와서 니 물건이니 보내겠다며 선심쓰듯 얘기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물건들이 필요 없었다. 그냥 그녀와 함께 쓰던 그 침대에서 둘이 뒹굴고 싶더냐는 냉소만을 흘렸을 뿐이다. 이제와 보내겠다는 그 물건들을 받아 쌓아둘 곳도 마땅히 없었다. 그녀가 얹혀 살고 있는 스물여덟평 그녀 친정부모의 아파트에는 그녀가 결혼전 쓰던 침대까지 각 방마다 가구들이 빼곡했다. 그녀 어머니가 오래되어 큰 맘 먹고 냉장고와 세탁기를 새로 바꾼 것이 얼마 전이었다. 많지도 않은 세 식구 살림에 냉장고가 두개일 필요도, 세탁기가 두개일 필요도 없었다.
게다가 마지막 내용 '착불'이라는 단어에서 그녀는 한번더 뒷통수를 가격당한 기분이었다. 그들이 그녀의 허락없이 그 물건들을 사용한 값은 못 낼지언정 그 짐들의 운반비를 그녀에게 전가한다는 발상 자체가 기발하다 싶었다. 여러모로 경제적 사정이 안 좋을 수 있다 해도 몇 백도 아닌 몇 십만원을 낼 여력이 안 된다는 건 말이 안됐다. 또 한번, 그녀는 그들에게 기만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짐이 도착한 날은 많은 비가 내렸다. 남쪽으로부터 태풍의 북상소식이 들려오던 날이었다.
화물트럭 한 가득 들어찬 짐들을 궁시렁대는 트럭 운전사의 도움을 받아 그녀는 말없이 집으로 올렸고 부르는 대로 운임비를 치뤘다. 좁은 아파트에 가구며 가전제품들이 가득 찼다. 함께 온 보따리 속에는 그녀가 두고 온 그녀의 학창시절 앨범들과 일기장, 책들이 싸여 있었다. 손님이 왔을 때 필요할 거라며 결혼때 그녀의 친정엄마가 장만해준 요와 이불들도 함께 왔다
"참, 해도해도 너무 한 거 아니니? 보낼려면 진작 보내던가, 이제 와서 이 짐들을 다 어쩐다니? 이 이불 낡은 것좀 봐라. 이런건 버리지 뭐하러 보내? 저 침대는 그냥 버릴까봐. 아깝긴 하지만 그 년놈들이 뒹굴었던 걸 어떻게 쓰냐? 찝찝해서."
이삿짐을 방불케 하는 짐들이 거실 한가득 들어찬 속에서 그녀의 친정엄마는 속상한 마음에 몇번이나 못마땅해하셨다. 차마 그런 그녀의 어머니를 마주볼 수 없어 그녀는 세차게 쏟아지는 비와 함께 번개와 천둥까지 요란한 하늘을 보며 온 힘을 다해 마음 속으로 처절한 저주를 내렸다.
'이제는 정말 간절히 바랍니다.
그가 사업을 하면 망할 것이요.
그가 회사를 들어가게 되면 쫓겨날 것이며,
그에게 다시 여자가 있다면 곧 떠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