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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떤책방 Dec 04. 2021

풍경 수집, 하나


[풍경 수집] 2021년 12월 3일 금요일 낮 1시, 불광천



카페에서 나와 불광천을 따라 걸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햇빛이었다. 추위가 들어오지 않게 외투를 여몄다. 한 손에 책을 들고 있었기 때문에 오래 걸을 생각은 없어, 조금 걷다가 불광천을 가로지르는 조그만 다리 위 중앙에 서서 풍경을 살펴보았다.


햇빛이 좋았고 물가에 있는 하얀 두루미 한 마리와 조금 더 멀리 있는 비둘기 떼를 보는 것이 좋았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데, 수많은 비둘기 떼가 일제히 날아올랐다. 커다란 비둘기 형상을 만들며 왼쪽으로 갔다, 오른쪽으로 갔다 하더니, 갑자기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감으로는 한 서른 마리쯤 되었다. 어떤 비둘기들은 내 머리 한참 위로 날아갔지만, 그 뒤를 따르는 어떤 비둘기들은 그보다 낮아 내 머리와 부딪칠 것 같았다. 나는 비둘기를 피하려 짧게 비명을 지르며 다리를 접어 앉았다.


다시 일어서서 비둘기가 날아간 쪽으로 몸을 돌려 보니, 날아가는 비둘기 떼 중 네 마리 정도가 방향을 정반대로 틀어 원래 있던 방향으로, 다시 내 머리 위로 날아오고 있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위협적이지 않았다.


이 비둘기들뿐 아니라, 함께 날아갔던 비둘기 떼에서 삼삼오오 다른 방향으로 흩어져 날아갔다. 비둘기 몇은 가로수 위로 날아가고 비둘기 몇은 가던 방향에서 더 멀리 날아가고 또 다른 비둘기들은 대각선 방향에 있는 오두막 쉼터 지붕 위에 앉았다.


지붕 위로 날아간 비둘기들에 대장이 있는지, 이후 지붕 위로 날아가는 비둘기들 수가 제일 많았다. 그러나 비둘기들은 오래 그곳에 있지 않았다. 오두막 지붕 위의 비둘기들 중 두 마리가 내가 처음 봤던 냇가로 다시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그다음, 또 다음으로 비둘기 커플이 연이어 날아갔다. 서로 소통하는 것이 분명했다.


냇가에 비둘기들이 다시 많이 모였는데, 신기하게도 한 비둘기만 지붕 위에 남아있었다. 그 비둘기를 올려다보고 있는데, 그 비둘기도 나를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약간 거리가 있어 그것이 정말 나를 쳐다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머리의 움직임으로 봤을 때 내 쪽을 본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그 비둘기가 먼저 고개를 냇가 쪽으로 돌리고 잠시 쳐다보더니, 비둘기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비둘기들 근처에 있는 두루미는 비둘기 떼가 날아오를 때에도, 내가 소리를 지를 때에도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두루미는 아주 잠깐 긴 목을 위로 세웠다가 S자 형태로 만들 뿐이었다. 저 두루미는 다리 하나를 들고 한곳을 빤히 쳐다보는데, 소파에 모로 누워 TV를 바라보는 신랑과 어딘가 닮아 보였다.


두루미를 보고 있는데 느닷없이 비둘기 떼가 다시 내 쪽으로 날아왔다. 이번엔 아까보다 더 놀래서 더 크게 소리 지르며 머리를 숙이고 앉았다. 약간 시옷 발음도 세게 한 것 같다. “에잇 씨!”


다 그런 건 아닌데, 몇몇 비둘기는 날 위협할 의도가 있어 보였다. 이번엔 아까와 달리 그대로 서 있었으면 정말 100% 부딪쳤다. 나는 놀란 마음에 짜증까지 조금 솟구쳐, 풍경이고 자시고 그 다리에서 벗어났다.


집으로 가면서 내가 비둘기랑 부딪쳤으면 누가 이겼을까 생각해 봤다. 비둘기가 발톱으로 내 피부나 옷을 찢고 가는 거 아냐, 하는 생각과 비둘기가 나에게 오면 주먹으로 때려야지 하는 생각이 이어졌다. 어릴 때 친구가 마로니에 공원에서 비둘기에 대해 해준 얘기로는, 비둘기가 날아오르다가 어린아이의 얼굴을 발톱으로 깊은 상처를 준 걸 봤다는데, 비둘기에 비해 인간은 너무 약한 거 아닌가 싶다. 인간의 무기는, 무기를 만들 수 있는 두뇌라는데, 지금 나에겐 책 한 권 밖에 없다 다행인 건 비둘기와의 다툼에서 설령 내가 다친다 하더라도 바로 119를 부를 수 있는 핸드폰이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나를 상처 준 비둘기는 금세 날아가 다른 비둘기들 사이에 숨을 것이고, 그럼 난 영영 어떤 놈이 내 살을 찢고 갔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익명으로 돌아간 비둘기는 자신의 발톱에 묻는 내 피를 깨끗이 핥겠지. 갑자기 목 안에서 피 맛이 느껴졌다. 겨울이라 건조해서 그럴 수도.


다시 현실로 돌아와보니 어느새 나는 집 근처 어린이집 놀이터를 지나고 있었다. 아이들이 꺄아아 하면서 뛰어다니는 걸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불광천에서 두루미와 비둘기 보듯이 내가 아이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아이들 사이에 있는 어른들이 날 경계할 것 같았다. ‘저 오렌지 외투를 입고 있는 이상한 여자는 누구지?’ 하면서. 영화에서 가만히 아이를 보다가 납치하는 장면 속 여자처럼. (물론 내 생각에 그런 것이고, 실제로 그들이 날 그렇게 여겼다는 건 아니다.) 그래서 걸음을 멈추지 않고 아이들을 잠시 바라볼 뿐이었다.

점점 아이들을 만날 일이 없다.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고, 아이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싶다. 그럼, 저절로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가만히 서서 아이들을 바라보면 이상해 보일 테니, 앞으로도 비둘기나 오리나 두루미를 봐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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