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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떤책방 Dec 22. 2023

불확실함에 대한 두려움

숨 쉴 때마다 온 몸에 통증이 퍼졌다. 몸에 열이 올라 6월인데도 추위를 느끼며 떨었다. 중학교 2학년을 보내던 시절이었다. 팔에 돋은 붉은 반점들을 보고 심각함을 느끼고 담임 선생님께 가서 말했다. 

"선생님, 아무래도 저 몸이 이상해요."

선생님은 심각성을 알고 조퇴하라고 했다. 

"그럼, 저는 개근상을 받지 못하는 건가요?"

"그렇지. 병으로 인한 조퇴가 되는 거니깐." 선생님은 생각났다는 듯이 한 마디 더 붙였다. "만약 네 병이 전염되는 거라면, 조퇴해도 조퇴 처리가 안돼. 그럼, 개근상을 받을 수 있는 거지."

"양호실 선생님이 풍진일 수도 있다고 그랬어요. 그럼 전염병인 거잖아요."

"그러게. 병원에서 진단서 떼어오면 돼."

선생님은 나에게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제가 혹시 병원 갔는데 풍진 같은 전염병이 아니면, 지금 가면 조퇴가 되는 거겠네요."

내 말에 선생님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렇겠지?"라고 반문했다. 그래서 나는 정식 하교 시간까지 버티기로 했다. 


양호실에서 먹은 타이레놀은 전혀 들지 않았다. 점심 시간에 밥을 먹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친구들이 밥을 조금 먹어보라 해서 조금 먹었는데, 그만 토하고 말았다. 그 뒤로 가만히 있을 때도 바람에 사시나무 떨듯이 몸을 떨기 시작했다. 수업하러 오신 선생님들은 내 상태를 보고 다 놀라서 조퇴를 하라고 했지만, 나는 그럴 수 없다고 반복했다. 친구들이 나 대신 말해주기도 했다. 


온몸이 천 개의 바늘로 찔리는 느낌이었다. 나는 견딜 수 없어서 울었다. 그런 나를 보고 친구들이 함께 울기 시작했다. 나에게서 어떤 집념을 느꼈는지 '그렇게 힘들면 집에 가라'고 했던 선생님들도, 반 친구들도 친구들과 함께 우는 나를 보고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하교 시간이 되어 드디어 집으로 갔다. 집에 엄마가 없어서 하마터면 기절할 뻔 했다. 옆집에서 엄마를 찾고 동네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내 붉은 반점을 보고 풍진이라 했다. 풍진 자체는 미열로 끝나지만, 지금은 합병증으로 독감이랑 같이 앓고 있다고 했다. 진단서와 약을 받아 집에 가서 울면서 잠에 들었다. 


다음 날은 토요일이었는데, 전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약을 먹고 있는데도 더 심각해진 것이다. 엄마가 누룽지를 만들어줘서 먹었지만, 금새 토하고 말았다. 화장실로 급하게 가던 도중 기운이 없어 문고리를 잡지도 못하고 뒤로 쓰러졌다. 중2 여자애가 바닥에 쓰러지니 큰 소리가 난게 분명하다. 거실에서 TV를 보던 큰 오빠가 달려왔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화장실에 기어 들어갔다. 


아플 때에는 잠을 계속 자게 되고, 기억이 파편화된다. 어떤 기억은 너무 선명하고, 또 어떤 기억에는 구멍이 생긴다. 그래도 회복의 순간만은 항상 분명하게 기억한다. 내 몸이 편안하게 풀어지고, 잠이 달콤해지고, 내가 있는 공간이 따뜻하고 날 돌보는 사람들이 고맙게 느껴진다. 내 몸과 마음이 선한 상태로 돌아가는 느낌이다. 아플 때에는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고, 세상으로부터 거부 당한 느낌이었는데.




졸업할 때 개근상이라고 상장 하나만 받았을 때, 너무 실망했다. 축하도 없었다. 그냥 표 나눠주듯이 받았을 뿐이다. 내가 고통으로 얻어낸 결과가 겨우 이거란 말인가. 나는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는 조금씩 조퇴를 하다가 고3이 되었을 때에는 선생님에게 허락 받지도 않은 자진 조퇴를 감행했다. 고1때 망막박리가 되었고, 고 3때 온 몸이 뒤틀려 호흡 곤란까지 겪으며 응급실에 갔지만, 가족 이외에는 아무도 몰랐다. 당연히 함께 울어줄 친구도 없었다. 아마 울어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해하기엔 친구들이 너무 어렸다. 


돌아가고 싶은 과거가 없다고, 과거에 마음을 쓰지 않는다고 오늘도 몇 번이나 생각했지만, 그래도 중2 여름방학이 점점 다가오던 그때가 좋다. 중학생으로 다시 살아보고 싶다. 그리고 교실에서 개근상을 위해 병과 분투했던 것처럼 극적으로 살고 싶다. 더 좋은 고등학교를 가기 위해 썼던 원서를 취소하지 않고 제출했더라면, 그 노력만은 빛날 수 있었을텐데. 어쩌면 같은 욕구의 발현이다. '확실한' 성과를 위해 아픈데도 조퇴를 하지 않았고 더 좋은 환경이었을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았다. 하나의 기억은 자존감의 근거가 되고, 또 다른 하나의 기억은 그렇지 않다. 



글을 쓰다보니 깨달은 게 있다. 함께 울어줄 사람이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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