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승우 Dec 11. 2020

"자녀분은 영원히 말을 못 할 겁니다"

자폐증 천재 동물학자, 템플 그랜딘

영화 <템플 그랜딘> 中


청천벽력 같은 의사의 선언이었다. 2살이 되도록 말을 못했지만, 부모는 그저 다른 아이들보다 약간 늦은 거로 생각했다. 현실은 달랐다. 의사소통 문제로 친구 한 명 사귀지 못했던 그녀의 병명은 '자폐증(당시에는 소아 정신분열 정도로 치부됐다)'. 템플 그랜딘은 자폐아였다.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림과 함께, 한 단어를 수만 번 반복해 읽어주며 말을 가르쳤다. 시청각장애인이었던 헬렌 켈러를 세상에 나올 수 있게 만든 앤 설리번처럼.

저는 행운아입니다.
저를 포기하지 않은 어머니를 통해
달라질 수 있었으니까요.


어머니가 행한 각고의 노력과 헌신 끝에 그랜딘은 말을 할 수 있게 됐다. 덕분에 학교도 다니게 되었지만, 중학생 시절 자신을 놀리는 아이를 때려 퇴학 되는 등 삶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때때로 찾아오는 신경발작 증세도 그를 괴롭혔다.


영화 <템플 그랜딘> 中


어머니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랜딘을 마운틴 컨트리 고등학교에 보냈다. 사실상 마지막 선택이었다. 우연, 아니 운명이었을까. 템플은 그곳에서 윌리엄 칼록 선생님을 만난다. 칼록은 한 가지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그랜딘의 성향을 장애로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끈기와 집중력'을 창의적인 프로젝트에 활용하도록 이끌었다.


칼록의 지지와 도움으로 4살까지 한마디도 못 했던 '자폐증 소녀'는 대학에 진학했다. 프랭클린 피어스 컬리지 심리학 전공자로서. 이후 그의 행보는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어릴 적부터 좋아했던 동물을 공부하기 위해 애리조나 주립대학교에서 동물학 석사 과정을 밟았고, 일리노이 대학교에서는 박사 학위를 받았다. '자폐', 그리고 '여성'. 당시로써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TED

그랜딘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게 자폐는 극복 대상이 아니라,
나의 일부이자,
영감을 주는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그는 동물학을 전공하면서 남자들도 꺼리는 도축장을 밥 먹듯이 드나들었다. 소의 행동을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남자 카우보이들의 조롱과 텃세는 끔찍했다. 소의 내장을 차에 마구 발라버리는 일까지 있었다. 하지만 그랜딘이 누구인가.


는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늘 카우보이 복장을 갖춰 입으며 자신의 의지를 다지고 드러냈다. 그리고 결국 일을 냈다. 도축을 앞둔 소의 스트레스와 공포를 최대한 줄일 수 있는 '자비로운 도축장(Humane Slaughter)'개발 것이다.


 자비로운 도축장(Humane Slaughter). 둥글게 빙빙도는 것을 좋아하는 소의 습성을 설계에 적용했다. / Grandin.com


자비로운 도축장은 소가 살아있는 동안 불안한 마음을 갖지 않도록 도왔으며, 동선을 최적화해 목욕 과정 중 물에 빠져 죽는 일이 없도록 했다. 이 윤리적이면서도 혁신적인 도축방식은 축사 입장에서도 비용 절감에 도움이 됐다. 현재 미국과 캐나다 소의 절반 이상은 그녀가 설계한 시설을 용한다.


템플 그랜딘과 소들의 단란한 한때. / yesmagazine


그랜딘은 ABC 프라임타임 라이브, 투데이 쇼, 래리 킹 라이브 같은 유명 TV 프로그램은 물론 피플지, 폭스, 뉴욕타임스 등 주류 매체에 소개됐다. 2010년에는 미국 타임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중 하나로 꼽혔다. 그야말로 전세계적인 스타가 된 것이다. 그녀의 인생은 영화로도 나왔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문을 열고 나가는 것, 그것뿐이었습니다.
그저 문만 열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지요.


현재 그랜딘은 콜로라도주립대학교의 교수이자, 자폐증의 권위자로서 전 세계를 돌며 지식을 전하고 있다. 그녀는 TED 강연에서 "나는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일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녀의 강연 영상은 단시간에 수십만 뷰를 기록했다.


[TED] The world needs all kinds of minds | Temple Grandin (한글자막)

https://www.youtube.com/watch?v=fn_9f5x0f1Q


영화 <템플 그랜딘>에서 그랜딘 역을 맡았던 클레어 데인즈(우측)와 템플 그랜딘.  클레어 데인즈는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1996년)의 줄리엣이다. /Van Redin, HBO


영화 <템플 그랜딘> 마지막 장면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Different, but no less
(모자란 게 아니라 다른 것이다)


자폐증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앞을 막는 모든 문을 박차고 나갔던 '다른 사람' 템플 그랜딘. 자그마한 모퉁이에도 발길을 멈추는 누군가에게, 그의 삶은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에디슨은 노력을 강조하지 않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