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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주 Jul 07. 2023

'당연함'의 함정

생각의 우체통

   한동안 '며늘아기'라는 웹드라마를 재미있게  본 적이 있다. 가히 갓 결혼한 새댁의 고군분투 시댁과의 관계에서  살아남기 프로젝트라 할만한 드라마였다. 드라마를 보면서 거슬리는 게 있었다. '당연하지' 뜻은 이치로 보아 그렇게 되어야 옳다, 이다. 며느리가 시집와서 시댁의 제사에 참여하는 게 당연한 거일 수 있으나 그 집 식구인 아들과 딸이 나가고 며느리만 일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하는 작은 아버지는 무식하다. 무식하고 지혜롭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함'이 얼마나 무서운 함정이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당연하다의 뜻풀이에 나오는 '이치'는 사물의 정당하고 당연한 조리를 가리킨다. 사물 뿐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터. 당연하다에는 그 안에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는 과정의 흐름이 함께 내포되어 있다. 자연의 이치가 대표적이다. 달이 기울면 태양이 뜨듯이, 동전의 윗면이 있으면 그 밑에는 반드시 보이지 않는 아래 면이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당연하다는 눈에서 보이는 현상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정서가 있음을 내포한다고 할 수 있다. 당연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당연함의 밑바닥에 있는 것도 함께 보아야 그 말을 쓸 수 있다. 가령 연장자에게 젊은 사람이 존중을 해야 하는 게 당연하다면 연장자는 젊은 사람에게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그에 맞는 행동을 해야 당연한 존중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마치 당연하다가 보이는 현상만 있는 것처럼 함부로 쓴다. 그 안에 숨어있는 뜻을 간과하고.


  MZ세대에게 젠더 갈등은 중요한 이슈 중 하나이다. 22년 깐느 영화제 수상작 '슬픔의 삼각형' 에서 남주인 칼이 여주인 야야와 저녁 식사값을 갖고 옥신각신한다. 아름다운 여자는 남자의 경제적 지원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영화는 사회에서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의 역겨움을 얼마나 코믹하게 잘 그렸는지. 영화의 첫장에서부터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서의 고정관념을 지적한다. 그런데 이 영화의 미덕은 경제적 우위에 있는 야야가 왜 돈을 지불하지 않느냐고 말하면서 사회 불평등의 문제와 함께  젠더 갈등 역시 경제적 우월과 열등에서 오는 불평등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 모든 상황이 한바탕의 코메디처럼. 영화는 돈이 있는 사람들이 크루즈 여행에서 당연하게 요구하는 서비스의 뻔뻔함과 그 위선이 갖고 오는 블랙코미디를 여실히 드러낸다. 그리고 똥거름으로 돈을 번 러시아 부호와 선장의 유명인들의 명언 배틀은 그들이 얼마나 위선적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명언을 했던 유명인들조차 위선적임을 밑에 깔고 있는 것은 아닌가싶다) 배가 난파되고 섬에 유배되어 먹을 것조차 손수 얻을 수 없고 불도 생성할 수 없는 무능력자 신세가 되어서야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행위라도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는 그들은 그조차 하려고 하지 않는다. 차라리 아비가일에게 빌붙어 사는 걸 선택하는 이들의 뻔뻔함은 당연함을 일상화한 사람들이다.


  당연함을 일상화, 한다는 것은 자칫 불평등과 불합리, 부조리에 대한 비판 없는 수용에 따른 많은 문제들을 맞닥뜨렸을 때 할 수 있는 게 없다. 여성에게 베푸는 남성의 지갑 여는 행위 뒤에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욕망이 숨겨져 있을 수 있고 여성의 아름다움과 날씬한 몸매만이 여성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에는 평생을 경제적 뒷받침에 자신을 소비해야 한다는 것이 깔려 있을 수 있으며 갑의 위치에서 타인에게 폭력이나 폭언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언제든 역습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하며 내가 사는 사회의 보이지 않는 부정부패들을 당연하게 여긴다면 언젠가는 고스란히 그 피해의 몫이 내게 돌아온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유대인, 불쾌한 진실의 작가 슐로모 산드는 출애굽기의 열세번째 재앙인 집안의 장자만을 죽인다는 구절에서 딸이 던지는 질문, 아이도 죽였냐는 말에 당황했더라는 책의 내용처럼 당연한 것은 없다. 우리가 당연하다는 것에는 한번쯤은 왜와 어째서라는 질문을 던져봐야 할 것이다. 저녁의 아름다운 노을 뒤에 어둠이 오듯이 지금의 안락함이 돌아가신 분들의 치열한 노동의 결과이듯이. 당연함에는 늘 함정이 있다.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면 우리는 당연하지만 부당한 요구를 들어줘야 하고 당연하지만 억울한 일에 대해 저항할 수 없다. 무엇이든 거꾸로 생각해 보기, 이것이 앞으로 우리가 정말 해야 할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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