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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주 Jul 12. 2023

'마그누스'를 읽고

책 읽는 우체통

  어릴 적 부모님에게 혼이 나거나 어린 시선으로 보기에도 부모님이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행동을 했을 때 한 번쯤은 두분이 내 부모님이 아니라고 상상해본 적 없는 사람이 있을까. 나의 아버지는 엄한 분이셨다. 쩝쩝 소리내며 국이나 밥을 먹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고 부모님이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집에 없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분이셨다. 저녁 밥상이건 아침밥상이건 늘 함께 밥을 먹어야 했고 아버지 먼저 숟가락을 들면 안되었다. 그럼에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릴 적 그분이 내 아버지가 아니었으면 상상했던 적이 있음을 죄송스럽게 생각했다. 나의 살과 뼈를 만들어 준 사람을 거부하는 건 깊은 증오와 반발 그 이상의 감정이 섞여있을 때야 가능할 것이다.


  '마그누스'는 이름이다. 애초에 곰인형의 이름이었지만 그가 선택한 이름이고 그가 거부한 과거의 인연들을 버렸을 때 다시 얻은 이름이기도 하다. 프란츠게오르그는 아버지 클레멘스 둥켈탈과 테아 둥켈탈과 단란한 집안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란다. 그러나 그에겐 다섯 살 이전의 기억이 사라진 상태다. 전쟁의 끝에서 엄마와 둘이서 피난을 가고 늦게 도착한 아버지와 합류하는가 싶더니 머나먼 멕시코에서 이국의 이름을 얻어 모자를 부를 줄 알았던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곧이어 어머니가 프란츠게오르그를 외삼촌 로타르에게 보내며 곧 세상을 뜰 것을 예감한다. 졸지에 부모를 잃은 프란츠게오르그는 런던에 살고있는 로타르외삼촌 집에서 살게 되고 '아담'으로 이름을 바꾸어 부르게 된다. 독일인의 이름이 불편할 영국에서의 삶을 위해서다. 그리고 서서히 알게 된 부모님의 정체, 의사인 아버지는 수용소에서 삶과 죽음을 가르는 일을 했고 남편을 따라 히틀러를 찬양했던 어머니의 실체를 확인하면서 마그누스의 '나는 누구인가'의 정체성, 그리고 전쟁의 참화를 겪게 만든 부모에 대한 증오, 자신을 부정하는 그리고 진정한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이 이 책 '마그누스'의 내용이다.


'단장1,2,3' 식으로 짜여진 구성은 중간을 뛰어넘다가 프란츠게오르그가 기억을 잃은 까닭인 작전명 '고모라'로 함부르크에 쏟아진 무차별 포탄으로 5만 명 이상의 사람이 죽은 사건이 끼어들며 시간의 흐름을 엮는다. 그러다 마그누스가 자신의 성장에 절대적 영향을 주었던 메이와, 로타르, 페기, 장수도사를 차례로 잃고 0의 상태로 다다랐을 때 책은 마친다. 전쟁은 많은 것을 파괴하고 많은 것을 왜곡시키고 많은 사람을 피폐화시키며 많은 사람을 영웅으로 만든다. 슐로모산드의 '유대인 불쾌한 진실'에서는 전쟁이 수많은 선량한 시민과 기독교인과 유대인이 죽었음에도 유대인 죽음을 가장 부각시키며 역사적 희생자로 유대인을 만들고 시오니스트들에게 이스라엘 땅에서의 팔레스타인 난민들과의 대치와 대량살상을 묵과하게 해주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시간을 쓰는 것은 현재의 사람들이 하는 것이지만 그 시간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은 개개인이 아니다. 어떤 특별한 사람들과 그것을 기억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는 사람에 의해서 써지고 재해석되는 경우가 많다. 사적인 싸움조차 피해자와 가해자간의 기억의 뒤틀림으로 제대로 해석되기 힘드는데 역사적인 사건이야 오죽할까. 인간을 평균에 가두어 말할 수 없음은 평균의 함정 때문이다. 개개인의 얼굴을 특징삼아 평균을 말할 수 있어도 인간의 얼굴은 모두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듯 사고의 영역 또한 평균을 재단할 수 없다. 그래서 예술작품이 나오고 소설이 읽히고 하는 것이리라.


  소설 속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책들과 시들과 인물들도 함께 등장한다. 역주라는 이름으로 설명된 실제 인물과 서적들은 마그누스의 행적을 이해할 수 있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마그누스가 겪은 배경을 설명하기도 한다. 낯선 형식들이 이야기를 방해하기 보다는 이야기의 진실에 더 가깝게 다가가게 하고 마그누스라는 인물이 겪는 혼곤과 혼돈을 잘 이해할 수 있게 돕는다. 낯선 형식을 통해서 마그누스가 수도사 장을 만나고 순순히 벌에 의해서 죽음을 기다리는 그의 마지막으로 마그누스가 깨닫게 되는 진정한 나, 그가 그동안 끊임없이 들고다녔던 진짜 마그누스인 곰인형을 던진다. 소설 중간중간 마그누스의 방황과 그의 고뇌와 인간이 벌인 어처구니 없는 이기심과 지루하기 짝이 없는 살육의 기록들은 내게 인간에 대한 소름돋는 진실을 깨닫게 한다. 슬프고 공허하고 절망스럽다. 그럼에도 나는 창밖의 풍경에 탄성이 지르고 살아있음을 절감하며 감사한다. 산다는 것의 구차함은 창밖 풍경 때문에 저 멀리 달아난다. 아, 인간은 얼마나 사랑스럽고 아름다고 뛰어난가. 그럼에도 그 이면에 있는 폭력과 이기심과 끔찍한 살육을 저지를 수 있는 괴물과도 같은 존재이니, 도대체 인간은 어떤 게 진짜 모습일까.


  글을 쓴다는 것은 프롬프터 박스로 내려가, 단어들 사이 혹은 주위에서, 때로는 단어들 한복판에서, 언어가 침묵하며 숨시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p13


  호수에, 이 침법할 수 없는 이 은밀한 무덤에 몸을 던졌을 가능성도 있다. p39


  어머니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작별인사를 한 것이다. 어린 시절, 말의 힘을 빌려 아이를 세상에 다시 태어나게 한 그녀가 이제 그 아이를 먼 곳으로 내쫒고 있다. 냉정한 몇 마디 말로.p53


  그는 코마라를 향해, 아무데도 존재하지 않는 곳을 향해, 스스로를 햐애 걸어간다. 광인의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나아간다. p91


  우리의 기억이 그런 식으로 끊임없이 되풀이해 말을 한다고. 혈관 속에 흐르는 피처럼 너무도 작고 희미해 우리는 들을 수 없는 단어로, 우리가 귀기울이지 않기에 더더욱 들리지 않는 소리다. p109


  하지만 너무나 쉽게 악과 한패가 되는 인간의 고아기라는 미로 속에서 탐정은 길을 잃는다. 악과 선, 악과 의무를 혼동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이라는 심연 앞에서 휘청거린다. 그들은 온순한 열의를 바쳐, 아무 양심의 가책도 없이, 더없이 수치스러운 일들을 완수할 것이다.p149


  무엇보다 우리는 상처입은 이 삶이 무슨 쓸모가 있는지 알고 싶다. 삶은 우리에게 너무도 소중한 것이기에 우리는 죽음을 이상화할 수 없다.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지만, 그럼에도 더는 죽음에 놀라지 않는다.p198


  낮과 아름다움의 편에 자리한 인간성과 계속 몸을 대기 위해서.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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