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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주 Oct 21. 2024

모 아니면 도

생각하는 우체통

    윷놀이를 하려면 윷판이 있어야 한다. 윷판은 선으로 그려져 있다. 선은 무수한 점의 집합이다. 이 세상의 모든 물질이 원자로 이뤄진 것과 같다. 우리 삶을 윷판에 놓고 도박하듯이 윷을 던져 간다면 모두가 윷이나 모가 나오길 바라지만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다.  사실 인생이란 무수히 던지는 윷가락이 도와 개 사이, 개와 걸 사이, 걸과  사이 그 점 하나하나를 찍으며 윷판을 도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야말로  한 번에 윷이나 모가 나오려면 복권에 당첨되어야 한다. 물론 예외는 있다. 수단이 좋은 사람, 윷가락이 불량일 경우 던질 때마다 윷이나 모가 나오거나 혹은 절대로 나오지 않는 경우다. 한국 사람은 그런 거 보면 정말 천재다.


   ‘모 아니면 도’를 바라는 경우 모의 경우야 그렇다치지만 도의 경우는 빽도라는 규칙 때문이다. 소 뒷걸음치다 쥐를 잡게 된다고 운 좋게 빽도가 나오면 굳이 인생 한바퀴를 돌 필요가 없다. 그야말로 지름길이다. 윷판이 비현실적인 건 바로 그런 경우다. 우리 삶에도 그런 경우가 드물게 있지만 그럴 때는 치루어야 할 일이 있는 경우를 많이 봤다. 이렇듯 보통의 사람 같은 경우 실컷 내가 던진 윷가락으로 차근차근 앞으로 가다 남에게 잡히기도 하고 적절한 때에 빽도가 나와야 하는데 난감한 상황에서 빽도가 나와 가던 길을 시 뒤돌아 곤란한 경우에 빠지는 게 다반사다.  윷놀이야 그저 재밌게 즐길 수 있지만 인생이 이러면 마냥 좋아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게임은 던지고 윷판에 말을 올리고 그 말이 한 바퀴를 돌아 벗어나는 순차적인 일을 제대로만 한다면 그 게임은 정직하고 해볼만한 게임이다. 하지만 점차 우리 인생은 윷판과 다르게 흘러가는 것 같다.


   얼마 전 우연히 프랑스의 정치를 쥐고 흔드는 세력 ‘그랑제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미테랑이 대통령이었을 때 총리까지 지낸 피에르 베레고부아의 권총자살 사건 뒤에 그랑제콜을 중심으로 한 철저한 상류 계급 출신의 정치인들의 배타주의가 그 원인이라는 것을. 시민혁명과 자유를 상징하는 프랑스에서 학력을 기반으로해서 공고히 된 신귀족계급을 배출한 교육기관이 그랑제콜이라는 사실이다. 우크라이나 이민자로 노동자 계급에서 사회당에서 정치활동을 통해 총리까지 된 베레고부아는 얼핏 노무현 대통령을 떠올리게 했다.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어 대통령까지 되었던 노무현대통령은 서울대를 위시한 소위 명문대 출신의 정치인,  한국 사회의 상류계층의 사람들에게 끝없이 멸시의 대상이었다. 대표적이었던 게 ‘검사와의 대화’였다. 대학을 졸업했다는 것 외에는 그들과 다를 게 없이 사법시험이라는 제도를 통해 변호사가 된 노무현 대통령을 검사들은 철저히 무시하고 조롱했다. 그리고 방송으로 그 모습은 그대로 전국에 방송되었다. 미테랑 대통령은 베레고부아의 장례식에서 개들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고 언급했다. 그의 추도사에 등장한 ‘개’는 언론과 그랑제콜을 졸업한 소위 엘리트주의에 사로잡힌 상류계층을 말한다. 베레고부아가 직위를 이용해 친구에게 거액의 자금을 빌려 아파트를 구입했다는 사실을 언론은 개처럼 집요하게 찾아 기사로 옮겼다. 그가 빌린 돈을 친구에게 다 갚았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평생 청렴하게 살았던 그를 부패정치인으로 몰고 간 사실을 베레고부아는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죽음을 선택한 것과 같다. 권력은 갑과 을을 만들과 갑이 되는 순간 그것을 놓치고 싶지 않은 자연스러운 감정을 이해하면서도 우리가 그토록 자유와 평등을 수호하는 것 같은 나라에서조차 그런 부조리함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나를 슬프게 한다. 아니, 그렇지 않은 세계를 꿈 꾼 게 너무 안일한 생각이었나.



  품위란 사람이 갖추어야 할 위엄이나 기품, 고상하고 격이 높은 인상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린 엘리트에서 그런 품위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나이를 먹으면서 매번 경험한다. 하는 말의 격과 생각하는 바, 또는 독서습관, 타인을 배려하는 모습에서 우린 품위를 발견할 수 있다. 좋은 대학을 나오고 좋은 옷을 걸친 사람의 입에서 격에 어울리지 않은 상소리가 나오는 것을 보고 무식하고 무지한 대화의 폭과 소재의 제한, 속물적 욕망의 표현이 난무하는 말로 존경의 마음이 우러나지 않게 하는 엘리트들의 모습이 비참함까지 느끼게 한다. 그들이 종종 소박한 삶을 지향하는 종교인과 함께 서서 찍은 사진은  위선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하는 말마다 뻔히 드러나는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부끄러움도 없고 뻔뻔하기까지 하다. 시정잡배라며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얕잡아 보고 던지던 말이 사실 자신들의 행위에서 더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미 사물을 분별하기 시작한 청소년이 보기에 어른이란, 그것도 사회 지도층의 어른이 내뱉는 거짓과 술수가 부끄럽다. 어른이 사라진 시대, 배우고 싶은 어른이 없는 시대, 자본이 영웅이 되는 시대에 아이들에게 어떤 꿈을 제시할 것인가. ‘모 아니면 도’라는 말은 그래서 자조적으로 들린다. 기회를 운에 혹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살아가는 젊은 세대에게 점점 할 말이 없어지고 있다.


  2024년 노벨 문학상은 한강에게 돌아갔다. 그녀의 작품 속에 들어있는 시대를 찌르는 뾰족한 역사와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 그리고 수상 후에 그녀가 여전히 일상을 살아가면서 요란하지 않게 수상을 축하하려는 세력들을 비켜 조용히 시간을 보내며 작가로서의 소임을 지속하고자 하는 소망을 드러낸 모습은 찾아보기 힘든 요즘 또 하나의 어른을 발견한 것 같아 반갑기만 하다. 글을 쓰는 일은 자신의 피와 살을 깎아 쓰는 일이다. 창작자로서의 끝없는 도전, 그리고 시대와 인간을 고민하고 안타까워하며 연민의 끈을 놓지 않고 희망을 발견하는 것이 작가의 소임이다. 또한 그 작품을 통해서 작가를 존경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은 짙은 고민을 하게 한다. 작가이기 이전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가 작품 속에서 구현한 세계와 작가의 간극이 넓으면 사람들은 작품까지 폄훼할 수 있다. 못난 영웅심에 한강 작가의 수상을 폄훼하는 일부 사람들의 빗나간 사고도 그와 비슷하다. 그러나 그런 소수는 중요하지 않다. 조용히 작품활동을 이어가고자 의지를 드러낸 작가에게 조용히 응원을 보내며 그녀의 다음 작품을 기대해본다. 그리고 어떤 세상의 속삭임에도 흔들리지 않는 작가로, 어른으로 존재해주길 부탁드리고 싶다. 윷판의 도와 개 사이, 개와 걸 사이, 과 윷 사이, 윷과 모 사이를 열심히 달리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어주기를. 그녀의 작품 속에서 더 따뜻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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