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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주 Nov 28. 2024

부끄러움에 대하여

생각하는 우체통

   천주교에서는 고백성사라는 게 있다. 천주교 교인은 적어도 일 년에 두번은 고해성사를 해야 한다. 부활절과 성탄절. 그때에 하는 고백성사는 판공성사라고 이름 붙이고 신앙생활을 꾸준히 하는지의 지표가 되기도 한다.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자신이 다니는 성전에 이런저런 헌금을 내는데 그건 어떤 종교나 마찬가지고 천주교도 그렇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를 택하는 이유가 이 헌금 때문이란 말도 있다. 얼마를 내는지 알 수 없으며 얼마를 내야 하는지 강제하지 않는 것. 돈을 내고 안내고도 신앙생활의 척도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하느님을 만나면서 마음에 부담이 없는 상태, 부끄러움이 없는 상태에서 종교생활을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신부님에게 고백성사를 하는 게 다른 종교에겐 불편해서 그게 천주교를 공격하는 요인이 되기도 하지만 나는 고백성사는 참 중요한 종교행위라고 생각했다.


  강아지를 키워본 사람은 경험하는 게 있다. 잘못했을 때 강아지를 혼내면 고개를 푹 숙이고 눈치를 보는 행동을 한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혼내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동물행동학을 말씀하시는 분이 강아지는 시간이 흐른 후 잘못한 일을 아무리 혼내도 소용이 없다고 한다. 강아지는 금세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잊어버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잘못한 순간 그 행위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야 그나마 효과가 있다고 한다. 고양이는 잘못하고 혼내봤자 소용도 없고. 그렇게 생각하면 자신이 한 행위를 돌아보고 후회하거나 반성하는 존재는 인간뿐이 아닐까 싶다. 고백성사가 타 종교인에게는 불편하겠지만 나는 인간이 다른 종류의 동물들과 다른 게 마음의 상태와 행위가 잘못을 반성하고 후회하고 용서를 구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사실 동물을 키워보면 인간보다 더 나은 충성심을 보여주는 경우를 종종 만나게 된다. 그런 동물을 사랑하지만 사람에게서 기대하는 것, 대화하고 내 생각을 나눌 수 없다는 점에서 관계의 한계가 있다. 피드백이 없으니 동물의 위로가 힘이 되기도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더 많다. 우리는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에게서 진정성을 발견하고 그런 성품의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싶어지지 않을까. 


   가끔 사람들이 고백소에 들어가서 잘못을 고백할 때 어떤 내용으로 고백을 할까 궁금하다. 고백하는 내용은 성직자도 비밀을 지켜야 하고 죄를 고백하는 사람도 주변에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대부분은 나와 비슷한 잘못을 고백하지 않을까. 사소한 일상에서의 잘못, 거짓말이나 타인에 대한 미움과 그로 인해 입힌 상처들. 물론 가끔 큰 잘못을 고백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이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고 믿고 싶지 않은 일이 너무나 많다. 그들은 그것을 잘못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돈을 무시로 빼앗거나 폭력을 휘두르거나 배신하거나 타인의 삶을 무차별하게 깨뜨리거나. 문득 사람들이 악마가 존재하길 바라는 건 자신의 죄악을 내 탓이 아닌 악의 근원, 무언가 다른 존재가 나를 그렇게 만든 것처럼 생각하고 싶어서가 아닐까. 

   내가 먹이를 준 것이 늑대인지, 순한 강아지인지에 따라 자신이 선한 사람이 될지 악한 사람이 될지 정해진다는 이야길 읽은 적이 있다. 그런데 이처럼 선과 악을 흑백으로 나누는 내 생각에 대해 질문이 생긴다.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선함과 악함, 어쩌면 그건 우리가 만든 편견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인간은 대체로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생존에 최적화된 존재이니까. 죄와 벌에서 라스콜로니코프가 '비범한 사람은 자신에게 새롭고 독창적인 말을 할 수 있도록 허용되며, 이를 위해 기존의 장애물을 뛰어넘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비범한 사람은 선악을 초월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닐까. 도덕이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인간이 지켜야할 최소한의 규칙을 학습한 것이라면 학습되지 않은 사람들, 도덕이나 선함에 대한 걸 그저 관념으로만 받아들인 사람에겐 선하게 살아야 하는 개념이 정립되지 않은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자 혼란스럽다.


 선과 악을 나누며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판단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확정하며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소리를 듣는다. 어쩌면 그들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나 역시 세상이 혼탁해지는 모습을 보며 혼란스러운데 한번도 그러지 않은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다.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들의 안경과 머리카락과 가방과 신발이 쌓여있는 방에서 느낀 분노의 감정도, 서대문 형무소에서 느낀 감정도 다 나와 같은 인간에 의해서 자행된 일의 역사적 사실이다. 인간은 원래 그런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작은 잘못에도 부끄러움을 느끼고 후회하는데 이 경쟁이 치열한 사회에서 나는 나약한 사람인 것일까. 한 해의 끝에서 여전히 이런저런 생각으로 어수선한 나는 24년의 나의 게으름과 나태가 가장 부끄럽다. 또 누군가를 시기하고 미워했던 시간들도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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