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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Jul 11. 2021

Ep.18_안녕 퍼스, 또 올게.

퍼스,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 6000

'지니, 내일 밤 이후로 호주 국경이 곧 닫힌대. 난 오늘 밤 대만으로 돌아가려고. 더 이상 위험을 감수하면서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아. 어서 집으로 가고 싶어.'



호스텔에서 만난 2주 워홀 선배인 데이지의 갑작스러운 귀국 소식. 이럴 수가, 오늘 아침 2주 뒤 떠나는 표를 간신히 예매했는데. 무시무시한 바이러스의 심상치 않은 파급력에 청정지역이었던 호주도 조금씩 들썩해지는 탓이었을까. 고민하는 사이에 좌석이 금세 사라지는 피 튀기는 티켓팅. 티켓 하나를 겨우 손에 쥐고는 장렬히 전사한 듯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난 해 질 녘이었다.



불행 중 다행인지 문자를 나눈 전 날 우리는 만났다. 이미 중국에 이어 한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바이러스가 무시할 수 없는 속도로 전 세계로 퍼지고 있던 시기. 청정지역이었던 호주도 점점 영향권에 들고 있었다. 우리 둘 모두 외국인으로서, 서비스업 종사자로서 이런저런 어려움에 처할 것을 예상하며 이른 귀국을 결정했다. 그리고 그날은 떠나기 전 안식처 같던 공원 산책을 한 번이라도 더 해야 한다며 만났던 것. 장대 같은 나무들이 쭉쭉 뻗어있는 킹스파크를 산책하고 퍼스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보며 서로의 사진을 찍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시티 속 호스텔 앞에서는 첫 날, 첫 주의 우울하고 막막하던 마음도 회상했다. 그렇게 미운 정 고운 정이 깃든 곳들에 먼저 작별을 건넸다. 떠나기 전 사막 투어를 함께하자는 약속을 하고 헤어졌는데, 그게 마지막이 될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지.



갑작스러운 소식에 잠이 확 깼다. 아쉬움에 빠져 있을 시간이 없었다. 이대로 이곳에 갇히게 될까 하는 두려움에 다음 날 떠나는 비행기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거의 2배 정도의 비행기 삯. 그러나 아까워할 시간도 없었다. 그러다가는 아침처럼 좌석을 계속 놓치게 될 것이 분명했다. 다음 날 오후에 태국을 경유해서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겨우 구하고 나니 이미 깜깜한 밤. 쉴 틈이 없다. 이제 짐을 싸야 한다. 그새 늘어나버린 짐과 살림살이. 다 가져갈 수 없으니 최대한 버리고 나눠야 한다.


외출해서 돌아온 켈리는 내가 갑자기 내일 당장 떠난다는 소식에 적잖이 놀라고 당황한 듯 보였다. 내가 짐을 싸는 동안 본인의 방에 조용히 들어가 있던 그녀. 괜히 걱정스러운 마음에 눈치를 보며 짐을 싸고 있는데 얼마 뒤 집에 누군가 찾아왔다. 나가보니 그녀의 부모님. 가끔 딸 보러 집에 오실 때마다 나를 조카 대하듯 귀여워하고 아껴주시던 노부부. 호주에 와서 맨날 일만 하고 지내는 내게 코알라와 캥거루를 보러 가야 한다며 동물원에 데려가 주고 싶어 하던 분들. 늦은 밤, 소식을 듣고 급하게 작별인사를 하러 오신 것이다. 그리고는 어린아이 품에 쏙 들어갈 크기의 코알라 인형을 내게 내미셨다. "지니, 결국 코알라 못 봤잖아." 순간 코알라를 붙잡고 나도 모르게 와앙 울음을 터뜨렸다.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느라 마비되어 있었던 걱정과 아쉬움이 한 데 터져 나온 것 같았다.


이어 집에 자주 놀러 오던 그녀의 베스트 프렌드, 티건도 도착했다. 평소 다정하던 그녀는 도착하자마자 나를 꼭 안아주었다. 그리고는 둘이 미리 준비해둔 것이라며 선물과 각자 쓴 편지도 건네주었다. 켈리가 귀가 후 조용히 방에 있던 것도 미처 다 쓰지 못한 편지를 완성하느라 바빠서였다는 후문. 눈시울이 마르지 않고 자꾸 붉어졌다. 웃다가도 울고, 울다가도 웃었다. 자주 함께하던 다른 이들과도 마지막 인사를 하라며 하우스 메이트가 건넨 소중한 작별의 순간이었다.


뒤이어 집 앞으로 달려온 한국 친구 연아는 달달한 버블티 한잔을 내게 안겨 주었다. 걱정하고 신경 쓰느라 하루 종일 제대로 못 먹었다는 나를 위해 그녀가 준비한 마음 한 잔. 가끔 친정 가듯 그녀의 집을 찾으면 가지고 있는 것들 중 제일 맛있고 좋은 것들을 내어주던 그녀. 나는 다가올 호주 겨울에 맞는 두터운 옷과 한국에서 가져온 상비약, 생필품 등을 채워 한 보따리를 건넸다. 더 좋은 것들을 주지 못할 망정 낡은 것들로 채워주는 마음이 못내 미안하고 아쉬울 뿐이었다. 그런데 웬걸, 귀국할 때 경비에 보태라고 현금이 든 봉투를 주는 그녀. 도무지 그녀를 당해낼 재간이 없구나. 나보다 조금 늦게 호주에 왔지만 평생을 약속할 사람도 만나고, 여러모로 호주 생활에 만족하던 그녀. 머지않은 날 한국에서 어서 다시 만나자며 가는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고민 끝에 호주 땅에 정착하기로 결정한 그녀의 행복도 깊숙이 빌었다. 뭉클한 아쉬움 속 작별 퍼레이드. 없었다면 더욱 아쉽고 허전하게 느껴졌을, 갑작스러운 마지막.



다음 날 이른 오후 짐을 챙겨 마스크를 낀 채 퍼스 공항에 도착했다. 이곳에 처음 왔던 날, 어리바리하게 유심을 갈아 끼우고 택시를 잡아 타던 순간이 스쳐 지나갔다. 이미 입국 심사 줄은 빼곡해 있었다. 각국의 여행객들이 어디선가 어렵게 구했을 각양각색의 마스크를 끼고 여러 열로 서 있었다. 긴 기다림의 시간을 지나 비행기에 오르니 찬란한 핑크빛의 노을이  안녕을 고한다. 처음 순간에도 나를 맞아주던 그 노을. 그래 너와도 마지막이구나.


여러모로 가슴이 벅찼던 날. 잘 있어, 또 올게. 안녕 퍼스,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 6000. 평생 잊지 못할 우편번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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