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영선 Apr 08. 2024

씨킴의 전시와 아라리오 갤러리

간만의 즐거운 전시관람

오래간만에 아주 재미있고 흥미롭게 전시를 보았다. 그리고 가장 오랫동안 누군가의 전시장에 있고 싶어졌다. 나는 내가 유학이나 대학원 재학, 취업 등의 이유로 떠나 있던 기간 이외에 이 지역에 있었던 동안에는 그의 개인 전시와 이곳에서 열리는 전시를 대부분 관람했다. 그곳은 씨킴이 운영하는 아라리오 갤러리이다. 생각해 보니 갤러리가 지금의 형태가 아닌 백화점의 한편을 차지하고 있었던 때부터 봤던 것 같다.


그간 일부러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이번 전시장에서 이 갤러리의 존재가 내 인생에 일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예술가로 살기 이전부터 백화점을 간간히 드나들며 보았던 전시가 인상적이어서 그런 전시도록을 몇 개 보관해 놨던 적이 있는데, 십 년도 넘게 지나 그 작가들의 작품이 다른 장소에 걸려있는 것을 보면서 그 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이 바로 초창기의 아라리오 갤러리에서였던 것을 떠올렸다. 나름 그곳에서 열린 전시작품들이 나의 현재의 취향과 미학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곳의 텅 빈 커다란 흰 공간이 작품을 돋보이게 하는 가장 이상적인 공간의 형태라고 생각해서 전시작품과 상관없이 그곳의 공간을 즐기러 머무는 때도 많이 있다. 한편으로는 미안한 일이지만, 많은 경우 멍하니 서서 거기 전시된 작품을 지워내고 내 안에서 내 작품들을 거기에 펼쳐놓고, 공간에서 다양하게 연출되는 형태를 탐구하곤 했다. 물론 나의 작품의 형태는 시각예술뿐만 아니라 무용 예술가로서 몸이 움직이는 형태와 공간 내의 구성에 대한 것도 포함된다. 그곳에 걸려있는 작품이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나는 그곳의 공간을 충분히 즐길 수 있을 만큼 그 공간은 정말 매력적이다.


아주 오래전 초창기에는 관람객이 거의 없었다. 나는 그게 오히려 좋았다. 실컷 그 럭셔리한 공간을 거의 무료로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전시장에 있으면 간간히 사람들이 들어오고, 입장료도 받는다. 이 문화예술의 불모지에 그런 엄청난(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그리고 작품력도 있는) 작품을 관람할 수 있는 엄청난 갤러리가 있다는 것은 도시의 품격을 올리는 일인데, 이곳 지역민들은 밖에 있는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도 그저 플라스틱 모형 정도쯤인 줄 아는 사람들이 내 생각엔 98%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보는 만큼 즐기고 누린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이 갤러리의 존재가 이 예술무지의 도시에 사는 동안 숨구멍과 같아서 이곳에 사는 게 답답할 때마다 이곳으로 도망을 가곤 했다. 해외나 다른 지역 예술가들이 나를 방문할 때면, 나는 늘 그들을 이곳에 데려가곤 했다.


그에 대해 다 알지는 못하고 또 그에 대한 여러 관점의 논란과 떠도는 이야기들이 있다는 것도 대략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이 왜 떠도는지도 모르는 바도 아니고, 미술분야의 관점에서 어떻게 그의 작품이 보이는지 미술사나 미술작품들의 주류에 대한 배경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다 옳다고도 할 수 없고, 그저 각자의 상황과 생각과 편견과 옹졸함을 반영할 뿐이지, 그에 대한 어떤 평을 할 수 있는 근거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도 내가 오며 가며 살았던 지역에 있는 이 갤러리와 그의 전시가 어떻게 다양하게 보이고 있는지에 대해, 나름 상당기간 동안 살았던 이 지역 거주민으로서 짐작하고 있는 그에 대한 이미지는 어렴풋이 있다. 그것도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개인적 관점과 연관된 나의 편견일 뿐이다. 하지만 나는 그를 만나본 적도, 또한 그런 것들이 이번 작품 자체를 감상하는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갤러리의 주인장이자 예술가인 씨킴이 예술가적인 면과 사업가적인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그런 점이 매우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돈 많은 사업가가 예술에 조예가 깊고 실제 창작활동까지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보통은 장사치로 끝나거나, 겉치레로 아는 척은 할지언정 예술가의 내면까지 갖추기는 힘들다. 작품을 돈벌이로 소장은 하고 작품을 보는 눈은 까막눈이면서 예술을 아는 체하는 사업가들은 종종 보았다. 나도 사업을 하는 예술가를 꿈꾸지만, 사실 그 둘은 물과 기름처럼 섞이기가 힘든 부분이다. 사업가는 소위 사기를 쳐야 사업을 잘하고, 예술가는 사기를 치면 작품을 하지 못한다. 그런 부분에서 많은 것을 갖춘 그가 나는 솔직히 참 부럽다. 뭐, 그래도 나도 지금은 내 작업실과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캔버스나 물감 정도는 구비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생각한다. 궁극적으로는 나도 그처럼 나만의 취향이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꿈이다.


그 모든 것들을 뒤로하고, 이번에 그저 전시장에 놓인 그의 작품을 보고 그저 평범한 관람객으로서 느낀 것들을 적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왜냐하면 정말 오래간만에 재미있는 전시를 즐겼기 때문이다. 이전 전시들에서도 분명 재미있는 부분이 있었지만, 이번 전시에서 느낀 것은, 이제껏 본 그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좋았다고 느꼈고, 주변 동시대 다른 전시들 중에서도 좋았으며, 아티스트로서 뭔가 진중하고, 솔직하고, 깊어지고, 대단한 것의 시초를 본 듯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좋은 전시는 오랫동안 떠나가지 못하도록 많은 생각을 일어나게 하는데 이번 그의 전시가 그랬다. 그는 분명히 예술가였고, 작품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고, 예술가적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고 느낀다. 이전의 작품들은 왠지 다른 작가들의 직접적인 영향력과 그가 가진 배경으로 인해 어쩌면 쉽고 가벼운 겉핧기와 같이 느껴졌다면, 이제는 그와 그의 삶이 일체화가 되고, 외부의 영향력이 내면화되어 그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뭔가 나올 것이 나오기 시작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이전에도 지금도 그 모든 것이 다 작가인 것이고, 그런 과정을 그의 전시를 통해 다년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는 것이 좋았다. 작가가 꼭 완성되고 농익은 어떤 것만 어느 날 '짠'하고 내밀라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건 아마도 나의 취향과 그의 작품이 공감되는 부분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내 현재의 경험치와 감성이 만들어낸 나만의 해석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이 글은 평론 같은 글이 아니라 주관적인 나의 전시 관람 후의 감흥에 대한 것으로 읽히기를 바란다.


우선 사탕과 같은 온갖 파스텔 색감의 향연은 정말 말할 수 없이 좋았다. '좋았다'는 말은 평론이라면 좋은 표현은 아니겠지만, 감상자로서 표현하기에는 충분한 말이다. 뭐, 좋은 걸 어떻게 말로 표현하고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마치 내가 좋아하는 색을 미리 알아서 나를 위해서 온갖 색채를 내가 좋아하는 커다란 캔버스 위로 뿌려준 것만 같았다. 사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았다면 나는 그 앞에서 하루종일 춤을 추고 싶었다. 그는 색감과 구도에 대한 감각이 충분히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색채들의 종합세트들이 마음껏 펼쳐져 있는 작품들의 벽에서 그가 말한 무지개에 대한 색이라기보다는 (사실 무지개의 색은 아닌듯하다) 백화점 사탕가게의 알록달록한 즐거움을 느꼈다. 그의 그림을 몽땅 갖고 싶었다. 세상의 가장 지루하고 평범한 일상이 있는 건물의 복도에 그런 그럼 들을 주욱 걸어놓으면 거기를 지나는 동안 사람들이 조금은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예를 들면 공무원들이나 정치인들이 죽치고 앉아 복잡한 사무행정을 하는 곳 말이다.


씨킴은 원래 이전에도 흐리멍덩한 비 오는 날의 사진을 전시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번 작품은 다르게 다가왔다. 그의 사진엔 분명한 감성과 감각, 정서가 녹아 있었다. 사진이 감동을 주는 경우는 많이 없었는데, 그의 화려한 배경으로 그런 장소의 감성을 녹아낸 것을 보면 그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 이면에 아이와 같은 다른 모습이 혼자서 천진하고 여리게 놀고 있을 것도 같다. 나는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 그가 찍은 풍경 속 마을은 실제로는 매우 낡고 버려진 듯한 곳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답고 뭔가 아스라한 정서가 느껴지는 곳이다. 화려하고 단정한 것만이 아름답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한없이 쓸쓸하고 축축하지만 뭔가 정겹고 따뜻하고 추억을 회상하게 하는 그런 정서가 사진 속에 있는데, 그런 날씨에 그런 마을을 혼자서 드라이브를 하며 지나친 적이 있는 사람들은 그의 사진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진들도 처음으로 갖고 싶어졌다. 저런 기분이 드는 날에 저렇게 드라이브를 하고 싶을 때, 이 사진 앞에 있으면 조금은 위안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나도 신호등 앞에 서 있을 때 왠지 바닥의 흰 횡단보도와 위에 걸린 신호등의 선들이 묘하게 이끌렸는데, 그런 것에 이끌려본 사람들이 가질 말할 수는 없지만 느껴지는 어떤 것들을 잘도 포착해 내었다. 나는 이런 이유 없는 묘한 느낌과 풍경을 좋아한다. 같은 느낌일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도 시각적으로 감성적으로 내가 느낀 것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사진첩이라도 사려고 했는데, 도록에 인쇄된 색감이 걸려있는 작품의 감흥을 담아내지 못했다. (어휴, 답답!) 이 작품들을 다 갖고 있어서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나는 내 작품도 매우 매우 좋아한다.)


전시장에 다른 한편엔 그의 자잘한 드로잉 작품 액자들이 벽면을 가득 들쭉날쭉 메우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그의 창작자로서의 내면과 과정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 벽면을 다 읽어내려면 하루로도 부족하다. 나는 킥킥거리며 웃으며, 한쪽으로 갔다가 다시 다른 한쪽으로 돌아보며 그에 대해 켜켜이 쌓인 일면들을 읽고 또 읽어 내려갔다. 그는 분명 웃긴 사람일 것이다. 유머러스하면서도 어떤 고민과 갈등이 있는지도 드러나 있다. 마찬가지로 이전 개인전에도 비슷한 류의 전시가 있었는데, 그때는 그냥, '뭐, 액자를 많이 살 돈이 있어 좋겠다'라는 생각이 조금 있었다. 그런데 이번 작품은 질적으로 달랐다. 액자가 아니라 작품의 본질이 더 드러났다. 드로잉이라는 것은 특히 작가적 재능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원초적 본질이라고 보는데, 나는 그것들을 충분히 발견할 수 있었다. 그의 작품에서 느낀 것들을 말하려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볼 것도 많고 많은 영감과 생각을 던져주는 전시이다. 작품을 깊게 읽지 않아도 그냥 보아도 기분 좋고 재미있는 전시이다. 여러 사업을 하면서 이렇게 작품을 할 수 있는 내적인 여유공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인데, 그래서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들도 계속계속 보고 싶다.


그의 이번 작품들은 무궁무진한 형식과 방식으로 뻗쳐지고 확장될 잠재력이 있다. 그가 그것을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뭐냐고 물어오면 나의 여러 생각을 던질 수는 있을 것이다. 그의 작품은 가지고 놀 것도, 확장될 부분도, 입고 싶은 것도 많다. 참 탐나는 작품들이다. 그가 포기하지 않고, 예술가로서 더 펼쳐지고 뿌리내리기를 바란다. 그의 갤러리가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척박한 이 지역을 떠나지 않고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우선은 기록해두어야 할 것 같아 거칠게 휘갈긴 전시 관람 후의 글.









매거진의 이전글 순수 지성이 사라지는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