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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선 Apr 19. 2024

판다와 고양이

사랑은 알 수 없는 것

요즘 전국적인 판다 팬덤이 형성되었다. 내가 판다를 몰랐더라면 극성 아이돌 팬클럽을 보는 것처럼 사람들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나는 쿵푸팬더 영화의 팬이라 일찍부터 비디오도 소장하고 웬만한 장면은 다 꿰고 있는데, 힘든 코로나 기간 중 우연히 발견한 판다들의 유튜브 영상을 보고, 실제 판다가 영화보다 더 영화스러운 귀엽고 신기한 동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판다가 나무를 타고, 굴러다니고, 덩치에 맞지 않게 아주 작은 소리를 낑낑대고, 발을 손처럼 사용해서 대나무를 알뜰하게 까먹고, 사과를 먹고, 하루 중 대부분을 잠을 자는 그런 동물인 줄 그때 처음 알고, 판다 영상에 폭 빠져들었다. 생긴 것 또한 검은 안경처럼 눈 주위만 동그란 무늬가 있고, 검은 카디건을 두른 것처럼 어쩌면 털이 그렇게 신기한 모양으로 등에 달려 있는지! 꼬리 모양은 또 어떠한가. 온갖 귀여움이란 귀여움은 다 타고 난 듯한 생명체가 하필 지구상의 한 나라에만 살고 있다는 것이 좀 아쉽지만, 죽죽 늘어나는 유연한 팔다리며, 쫑긋거리는 동그란 귀가 봐도 봐도 기분이 좋았다.


엄마 판다가 아기 판다를 돌보는 것을 보면, 전국의 부모들이 보고 배워야 할 중요한 미덕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아기 판다가 독립을 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아침마다 그냥 눈물이 났다. 지금도 그 영상을 보면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수 있다. 판다들의 영상을 보면, 한 때 인간에게서 가장 귀했던 것들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가령 어미가 새끼를 사랑하고 교육하는 방식이라든지, 새끼를 떠나보낼 때 엄마의 마음이라든지, 이를 아낌없는 순전한 사랑으로 돌보는 사육사들의 진정성과 직업정신, 혹은 숭고한 장인정신과 같은 것들 말이다. 마치 한 편의 실시간 드라마 같았다. 현재 인간들과의 다양한 관계가 저렇게 자연스럽고 순수하게만 이루어질 수 있다면 세상이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태어난 첫아기 판다 푸바오가 멀리 떠나간 지금, 나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도 상실감과 슬픔에 빠져있다. 내가 판다를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처음엔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내 부모님의 퍼그 강아지를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나도 다른 한 편의 많은 사람들처럼 푸바오와 사랑에 빠져있는 이들을 이해 못 할 시선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사랑이란 말은 잘 이해도 못 하고, 그냥 뭔가 남부끄러운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조금씩 그게 무엇인지 종종 생각하게 된다. 사랑은 꼭 사람에게만 향하는 것은 아닌 듯하다. 그리고 남이 볼 땐 이해 못 하고 남사스럽고 심지어는 미친 자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아주 어렸을 적 '사랑이란'이란 단어로 시작되는 문장들이 대유행이었는데, 그때 그 단어에 대한 정의가 무슨 책 한 권이 넘을 일인가 싶었는데, 난데없이 판다와 내가 좋아하는 춤을 계속 추면서 그게 무엇인지, 그게 왜 유행인지 이제야 알 것 같다. 그리고 나도 '사랑이란'이란 단어에 대한 온갖 나만의 문구를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정리한 문구들을 가지고 오래전 이에 대해 쓰인 책을 찾아서 비교해 본다면, 아마도 대부분이 일치할 것이라고 상상해 본다.


나도 그런 의문을 가진 적이 있다. 사람들이 동물이나 다른 사물에 집착해서 사랑을 퍼붓는 만큼 다른 사람들한테나 잘해야 하는데, 많은 경우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괴롭힘과 민폐를 끼치는 사람들이 유독 자신이 기르는 동물이나 식물에게 더 유난을 떠는 것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그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다른 것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예를 들면, 내가 부모님이 기르던 퍼그 강아지에 대해 지은 시에서도 언급했듯이, 부모님은 조부모님들이 돌아가셨을 때에도 그리 슬피 울거나 침울해하지 않았는데, 그 퍼그 강아지가 감기에 걸려 죽은 것에 대해서는 몇 날 며칠을 돌아가며 통곡을 하며 울었다. 그런데 물론 그것이 부모님이 조부모님을 퍼그강아지만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냥 다른 거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어떻게 다른지는 설명할 길이 없다. 그냥 그렇다. 사실 나도 미국에 가 있을 때, 부모님이나 다른 식구들에 대해서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그 퍼그 강아지가 너무 보고 싶어서, 나도 모르게 전화를 해서 '퍼그 강아지를 바꿔달라'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세상의 사물이나 장소가 있는 그대로 보이지 않고 자꾸 추억이 쌓인다는 것은 세상에서의 세월이 많이 흘렀다는 것일까? 삶은 계란과 군고구마, 스팸과 군밤은 퍼그 강아지가 제일 좋아하는 것들이어서 퍼그 강아지가 죽고 나서 한참 동안은 삶은 계란 껍데기 까는 소리만 들려도 눈물이 났다. 이제는 운전을 하다가 대나무잎이 무성한 것과 유채꽃이 노랗게 피어있는 것만 봐도 눈물이 난다. 푸바오가 생각나기 때문이다. 사육사들이 가장 애정이 깊겠지만, 매일 유튜브로 지켜봤던 판다의 팬들 마음도 결코 가볍지 않다. 기술을 통해서도 그런 마음이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이 새삼스럽다. 그건 그냥 판다라는 동물에 대한 것이 아닐 것이다. 나는 판다를 통해 계산 없이 무언가를 준다는 것, 자연스러운 모정(모정은 누구나 갖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환경에 의해 교육이 된다는 의견도 있긴 하다. 하지만, 푸바오의 엄마는 이를 배운 적이 없어도 보여주는 것을 보면 조물주가 자연에 심어준 모정도 존재한다고 믿는다), 누군가를 하염없이 지켜본다는 것, 돌본다는 것 등이 얼마나 소중하고, 순수하고, 우리가 많이 잃어버리고 있는가를 깨닫게 된다. 우리는 그런 돌봄과 아낌없는 사랑과, 온정, 그런 것들이 그리운 것이 아닐까? 부드럽게 만지고, 장난치고, 먹을 것을 입에 넣어주고, 가끔 아무 곳이나 퍼질러 낮잠을 청할 수 있는 편안한 게으름, 이런 것들이 마냥 좋았던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일지도 모른다.


푸바오 팬덤을 지켜보면서 과거에 미국 대학원 학과장이 기르던 고양이가 생각이 났다. 그 교수는 기찻길 바로 옆에 있던 아이스크림 공장을 싸게 매입해서 집으로 개조해서 살았는데, 독특한 그 집으로 매 학기가 시작되면 사람들을 불러서 파티를 열었다. 그 교수 부부는 아이는 없고, 오랫동안 기르던 늙은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는데, 어느 날 내게 본인들이 없는 주말 하룻밤 동안 자신들의 집에 와서 고양이와 함께 있어주는 아르바이트를 제안했다. 고양이가 눈이 멀고, 알아서 먹고 마시기 때문에 그저 밤에 혼자 있을 고양이를 위해 그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나는 당시 동물을 기르는 사람들을 이해를 못 하던 시절이었고, 특히 고양이는 기겁을 할 정도로 무서워하고 싫어하기 때문에, 대신 다른 미국인 동기에게 그 일이 주어졌다. 그 친구는 나와 많이 친했고, 고양이를 좋아하긴 했지만,  그다지 책임감이 있는 학생은 아니었다. 그는 밤에 내게 전화를 해서, 고양이랑 같이 남의 침대에서 자는 게 기괴하고 고양이가 어차피 눈도 멀고 대부분 얌전히 가만히 잘 있으니 특별히 돌볼 일도 없어서 그냥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결국 그 친구는 고양이를 빈 집에 내버려 두고 자신의 집으로 갔다. 교수 부부는 자식처럼 키우던 고양이를 혼자 자도록 내버려 둔 친구에게 무척 화가 났고, 그 일 때문에 그 친구는 대학원 전 과정 3년 내내 그 교수의 미움을 샀다. 당시에는 하룻밤을 못 채우고 집으로 돌아온 무책임한 대학원 친구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게 뭐라고 잘 있는 고양이 집에 혼자 자게 버려둔 일로 사람을 3년 내내 힘들게 한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젠 아주 조금은 그래도 이해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냥 그런 것이다. 대학원 친구인 사람이 덜 중요해서도 아니고, 그냥 그 교수 부부는 그 고양이를 아주 많이 사랑한 것이다.


그 고양이 얘기를 쓰자니, 갑자기 금붕어도, 대문 밖으로 도망쳐 사라진 거북이도, 친구의 늙고 눈먼 커다란 강아지와 차에 동석을 해서 여행을 간 것도, 룸메이트 집에 가서 고양이가 자꾸 내 이불 위로 와서 앉아있던 것도, 얼마 전 넘어지는 부모님을 일으켜 세우려는 것을 보고 오해해서 낯선 이에게 달려들어 상처를 입힌 지금 기르는 부모님의 개 얘기도 생각난다. 또 다른 노교수는 집에 기르던 식물에 물을 주는 아르바이트생을 구했는데, 며칠 여행 후 식물들이 시들고 잎이 떨어져 버려서 눈물을 수액처럼 뚝뚝 흘리며 슬퍼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 많았구나, 이해 못 할 동물과 사람의 사랑이야기가. 하긴 나도 작년에 호박과 사피니아 때문에 온 정신이 빼앗겼었지. 아, 학교에 다닐 때에는, 교실에 어쩌다 들어온 작은 벌레를 키우겠다고 필통에 넣어 다니기도 했고, 바지락과 소라를 키우겠다고 몰래 다락에다 물을 받아 이를 지켜봤던 때도 있다. 글을 이만큼 쓰다 보니, 나도 아주 많은 것을 사랑하고 사는 사람이었다는 게 참으로 놀랍다. 나는 내 공간과 작품을 빼놓고는 세상의 모든 것을 대부분 싫어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말이다. 사람이 아닌 다른 것을 좋아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앞으로 책 한 권 정도는 쓸 수 있을 것 같아 연재를 시작해 봐야겠다고 생각해 본다.


아무튼 팬덤이라는 것은 일종의 사랑이고, 대부분의 사랑은 남들이 볼 때 이해 못 하고 꼴불견처럼 볼썽사나울 때도 많은 것 같다. 그래서 사랑이란 단어가 묘한 매력이 있는 듯하다. 푸바오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그냥 그게 어쩌다 많은 사람들이 빠지게 된 사랑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그나저나 아이고, 푸바오 잘 있는지 모르겠지만, 잘 지내길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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