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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 빠진 고슴도치

허구로 진화한 일상

by 이영선





최근에 지구에서는 역사적인 사건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과학자들이 동물의 뇌를 가지고 많은 실험을 한 결과 동물과 소통을 할 수 있는 언어를 알아내게 되었고, 사람들의 실험 덕분에 일부 동물은 점점 진화되어 지능지수가 높아졌습니다. 나아가 그 동물이 가진 많은 재능과 생물학적 장점이 인간의 삶과 점점 동화되어 이들은 인간과 함께 직업을 갖고 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딱딱한 로봇보다는 진화된 형태의 변형 동물을 연구하는 것이 더 인간친화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때부턴가 인류 발전에 대한 연구의 방향을 식물과 동물의 인위적 진화와 변종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어린아이들은 이제 더 이상 삭막한 보육시설에 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꽃과 나무와 같은 식물은 입이 없어서 사람들처럼 말하지는 못했지만, 사람들은 깊은 연구를 통해 이들이 소통을 하는 방식과 신호체계를 알아냈습니다. 덕분에 사람과 식물은 아이들 수준의 의사소통이 서로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식물은 특히 아직 말을 배우기 전의 어린아이들에게 좋은 대화 상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혼자 나와 노는 아이가 길을 잃는 법도 없었습니다. 아이의 발걸음이 내딛는 곳에 자라난 풀들이 아이에게 집으로 가는 길을 안내해 주었습니다. 아이가 넘어져서 울 때면 나무가 가지를 드리워 아이를 일으켜 세우고, 나뭇잎으로 무릎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주었습니다. 장난꾸러기 어린 나무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아이를 달래주기도 하고, 동그란 덤불숲 안으로 아이를 숨겨주며 함께 숨바꼭질 놀이도 했습니다. 놀다가 배가 고파진 아이가 있으면 나무는 몸통을 흔들어 잘 익은 과일을 떨어뜨려 간식을 챙겨주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바닷가에 사는 아이들은 훈련된 돌고래가 바닷속 돌보미가 되어 아이들이 헤엄을 치다가 위험한 곳에 가지 않고 길을 잃지 않도록 보호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원래 놀기를 좋아하는 돌고래는 보육교사가 되어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천직인 듯했습니다. 나무와 풀과 야생꽃이 곳곳에서 자라는 세상 모두가 아이들의 놀이터였고, 아이들이 세상을 자연과 함께 신나게 누비는 동안, 어른들은 안심하고 직장에서 각자의 일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 의사들은 이제 하던 일을 대부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매일 비슷한 증상으로 여기저기 아프다고 찡그린 얼굴로 병원을 방문하는 환자들에게 지쳐 툴툴대며 그간 반복되는 힘든 업무에 시달려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끔 멍하니 책상에 앉아 창문 너머 지나가는 구름이나 의미 없이 쳐다보는 일이 많았습니다. 환자의 얼굴을 한 번 쓱 보고, 기계처럼 숫자를 맞추어 진료비를 계산하고, 아침시간부터 병원 로비에 북적거리는 환자들의 숫자와 남은 진료 시간을 재다 보면 또다시 집에 갈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반복된 처방과 영혼 없는 권고를 하던 의사들은 세월이 갈수록 점점 성격이 까칠해지고, 별로 쓸 일 없는 귀와 입은 점점 퇴화되어 조그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나마 뭔가 신변에 이상한 걸 느낀 예민한 의사들은 일치감찌 병원일을 그만두고, 시내 한가운데에 여름에만 여는 아이스크림 가게를 열어 돈을 벌어 나머지 기간에는 세계여행을 가거나, 멋진 비엔나 한 구석에 분위기 좋은 작은 카페를 열고 사람들과의 대화를 즐기는 삶을 선택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의사라는 직업이 힘들고 못해먹을 짓이라고 투덜거렸지만, 간판에 ‘의사’라는 단어를 집어넣는 것만으로도 아직 충분히 돈벌이가 될 만큼 인기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의사 아이스크림 가게’와 ‘전직 의사 카페’에 모여서 허연 아이스크림과 검은 커피를 들이키며 뭔가 건강하고 똑똑해질 것 같은 기분을 즐겼습니다.


과학자들은 인간성을 혹사시키는 의사라는 직업에서 사람들을 해방시켜 이들을 좀 더 인간답게 살도록 만들기 위해 대체적인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중 그림 그리는 것이 취미였던 오스트리아에 있는 한 연구진이 의사들의 모습이 마치 고슴도치와 흡사하다는 놀라운 논문 결과를 발표하게 되었고, 이는 그 해 노벨 생명과학상 후보에 오를 만큼 중요한 성과였습니다. 이후 전 세계 연구진들이 오랜 연구 끝에 고슴도치의 지능과 바늘의 약효를 강화시켜 의사를 대체할 수 있는 변종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고슴도치의 바늘은 생체조직이라 인체에 적용해도 거의 부작용이 없었으며, 고슴도치가 노년기에 다다르기 전에 머리카락처럼 몇 번을 뽑아 써도 다시 자라나는 놀라운 재생능력이 있었습니다. 바늘은 자연친화적 산물이라 당연히 산업 폐기물과 공해를 크게 줄일 수 있었고, 굵기와 크기도 다양해서 남녀노소 상관없이 맞춤 시술이 가능했습니다. 언어능력은 떨어졌지만, 어차피 사람 의사도 진료 시 대화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므로 고슴도치의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는 작은 귀와 입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예 없지만 않으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의료 시술 능력만 중점적으로 진화시킨 고슴도치 의사는 하필이면 사람들의 다양한 감정을 이해하기엔 역부족인 사람 의사의 쪼잔한 감성까지도 닮아 있어서, 진료 시 사람들이 느끼는 불편감까지는 크게 개선시키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전처럼 고슴도치 의사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눈치를 보며 진료실을 찾았고 이것이 관례처럼 굳어졌습니다. 그저 사람 의사의 반복적인 일상을 대체하는 것만으로도 고슴도치 의사의 역할은 대단히 만족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가끔 지능이 높아져 약아빠진 우성 고슴도치는 예전에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반복되는 일에 어느새 이전의 사람 의사들처럼 싫증을 내는 것도 따라 하기 시작했습니다.


고슴도치 의사들은 환자가 진료실에 들어오면 조그맣게 툭 튀어나온 현미경과 같은 눈으로 사람들의 모습과 표정을 한눈에 훑어 내리고, 이내 바늘이 잔뜩 꽂힌 등에 발하고 똑같이 생긴 손을 넣어 필요한 바늘 몇 개를 뽑아서 아픈 곳에 찔렀고, 그 일은 채 몇 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약과 주삿바늘에 대해서는 전문적인 지식으로 무장된 고슴도치였지만, 팔다리의 생김새가 자신들과 다르고 병원일을 끝낸 후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 사람들과 달랐기 때문에, 사람들이 어떻게 아프게 되었는지, 아프지 않기 위해 뭘 해야 하는지, 이들이 왜 약효가 떨어지면 똑같은 증상으로 병원을 또 방문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고슴도치 의사 선생님, 제가 어깨가 좀 아픈데요, 밤새 웹툰을 보느라 구부정하게 앉아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요?”라고 물으면, “그럴 리가요, 나는 등을 다 펴도 이렇게 반원처럼 둥그렇게 보이는 모습으로 앉아 있는데 내 어깨는 아픈 적이 없어요. 내가 고개를 다리 사이로 집어넣으면 나는 공보다 더 동그랗게 등을 말고 있을 수도 있어요. 한 번 볼래요?”라고 대답하며 의자 위에 가시만 표독하게 드러낸 채 축구공처럼 동그랗게 말려서 앉아 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환자는 고슴도치 의사의 기괴한 모습을 보고 모욕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원래 목소리도 작은데 그나마 고개를 공같이 가시 몸통 안으로 집어넣고 있으면, 고슴도치 의사가 뭐라고 하는지 거의 들리지도 않았습니다.


병원은 점점 더 많이 생기고, 매일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나오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늘어가는 병원과 번식력이 왕성한 고슴도치 의사의 수만큼 건강한 사회가 되어가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일단 한 번 병원을 다닌 사람들은 병원을 다니는 횟수가 점점 늘었고, 몸의 한 부분이 잘못되면 다른 부분이 아플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이 느껴졌습니다. 고슴도치 의사는 맨날 같은 일만 하면서 앉아 있느라 배가 불룩 동그랗게 튀어나오고, 사람들보다 수명이 짧아서 주치의가 바뀌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아이들은 뾰족하게 빛나는 고슴도치 의사의 바늘에 겁을 먹고 울기부터 하고 고슴도치 의사는 그럴 때마다 뱁새같이 작은 눈으로 아이를 흘깃 째려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커다란 밤나무 밑에 새로운 병원이 문을 열었습니다. 병원의 이름은 ‘밤나무 밑 정형외과’였는데, 보통 병원이 생기는 주변에는 밤나무들이 왕성히 자랐습니다. 아마 식물도 저희를 닮은 것은 본능적으로 알아보는 촉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방문한 사람들 사이에서 금방 이상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연구진이 새로운 변종 동물을 개발한 걸까요?”

“글쎄요, 무슨 일인가요?”

수군거리는 사람들 사이로 잘 익은 밤송이 몇 개가 ‘투툭’ 떨어졌습니다.

회원수가 많은 ‘홍당무 마켓 앱’에도 동네 채팅창이 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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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고 쓰고 그리고 만드는 통합창작예술가. 장르와 경계를 녹여내어 없던 세상을 만들고 확장하는 자. 그 세상의 이름은 이영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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