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의 이야기(5) - 엑싯(그 이후)
"제품 원칙(Product principles)"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제품을 만들 때 모든 의사결정의 기반이 되는 근본적인 가치이자 제품의 전체적인 방향성을 설정해주는 기준을 의미한다. 회사의 '미션'이 기업의 존재 이유와 철학을 말해준다면, 제품 원칙은 그 미션을 사용자들을 위한 제품으로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필요한 기준을 말해준다. 크고 작은 다양한 기능들이 하나의 제품에 조화롭게 공존하기 위해서 필요한 가이드라인이기도 하다.
제품을 만들 때 기준이 되는 제품 원칙이 있는 것처럼, 나만의 원칙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는 요즘이다. 크게 세 가지 - 제품, 일, 삶 - 에 대해 나를 이끌어줄 원칙이 있기를 바란다.
첫째, 제품 원칙.
앞서 언급했듯 "제품 원칙"은 어떤 제품을 만드는 데 근본이 되는 가치를 의미한다. 다만 나는 평생 하나의 제품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여러 회사에서 다양한 제품들을 만들어갈 것이다. 때문에 특정한 제품이 아니라, 어떠한 제품인지와 관계없이 적용할 수 있는 나만의 가이드라인을 세우고 싶다.
물론 아직 한 회사에서 1년 동안 하나의 제품만 다루어본 주니어 PO로서, 지금 완성된 나만의 제품 원칙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짧은 기간 동안 한 가지 정해본 것이 있다면,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지의 관점을 놓치지 말 것. 즉, 목적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확인할 것"이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작은 기획 디테일이나 일정에 맞춰 출시하는 것 자체에 필요 이상의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있을 때가 많았다. 하지만 '대세'에 지장없는 기획의 디테일을 하나하나 챙기는 것보다 상위 기획들이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를 풀 수 있는 방향으로 잘 설계되어있는지 점검하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일정을 잘 지키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출시 전에 꼭 완성도 높게 개발되어야 하는 기능이 있다면 완성도를 떨어뜨리고 일정에 맞춰 출시하는 것보다, 대표나 프로젝트 관련자들에게 일정 지연에 대해 잘 커뮤니케이션하는 일이 더 필요한 일일 수 있다. 해야 하는 일을 잘 해내는 것에서 만족하지 않고 이 일을 지금 하고 있는 것이 맞는지, 지금 해야 할 중요한 일이 맞는지 스스로 점검하는 것 - 앞으로 내가 커리어에서 어떤 제품을 맡게 되든지 적용할 수 있는 상위 기준이다. PO 경험이 더해질수록 나만의 제품 원칙이 조금씩 더 자리잡아 가기를 기대해본다.
둘째, 일에 대한 원칙
'제품 원칙'이 PO라는 특정한 직무에 한정된 원칙이라면, 일을 하면서 어떤 가치를 중심에 둘 것인지에 관한 원칙을 세우고 싶다.
최근에는 '신뢰'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다른 사람과 함께 합을 맞추어가야 하는 것이 회사이기 때문에 '믿고 같이 일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낀다. 일은 정말 잘하지만 동료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하는 사람이 회사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일을 잘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고 그것을 통해 실력에 대한 신뢰를 얻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이야기를 나눌 때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하고 존중해주는 것, 팀 내부적으로 혹은 팀간 갈등 상황이 생겼을 때 원만하게 해결하는 것, 어떤 의사결정을 내릴 때 팀원들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 등 '소프트 스킬'을 통해 신뢰를 쌓는 일이다.
나중에 어떤 조직의 리더가 되더라도 구성원들의 신뢰감을 얻은 상황에서 내리는 의사결정과 리더 자리의 권위로 내리는 의사결정이 가져올 결과에는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전자는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이게 할 수 있지만, 후자는 구성원들이 '위에서 하라고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움직이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 스스로를 돌아보았을 때에도 신뢰하는 사람과 협업할 때 더욱 열정적으로 주인 의식을 가지고 일에 임할 수 있었다. 반대로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느끼는 신뢰감이 그 사람의 동기부여와 주인의식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이다.
회사에서 6개월마다 개인별 성과를 평가하는 시기가 오면 가끔씩 이런 질문을 받는다.
"A와 함께 일해보니까 어떤가요?"
이 질문을 받음과 동시에, A는 나와 일해보니 어떤지 질문을 받겠구나 생각한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믿고 같이 일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전문 역량과 소프트 스킬을 잘 쌓아가야겠다고 다시 다짐한다.
마지막으로, 삶에 대한 원칙
일하는 나뿐만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는 나로서 어떤 태도를 가질지에 대한 기준이다.
성적과 대학 입시에 매달리던 고등학생 시절, 방황하며 여러 가지 길을 시도하던 대학생 시절, 그리고 스타트업에서 일하고 있는 지금. 어떤 순간이든 시간을 헛되게 보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살았던 것 같다. 그런데 막상 "왜 이렇게 열심히 살려고 하지?"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본 적이 없었다. 열심히 살지 않는다고 해서 큰 일이 나는 것도, 누가 나에게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닌 데 말이다.
그래서 열심히 살려고 하는 이유를 파고 들어가보니, 잘하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 욕심과 인정욕구를 파고 들어가보니, 나의 말과 행동이 영향력이 있으면 좋겠다는 욕망이 있었다. 그 욕망을 파고 들어가보니, 나의 영향력을 세상을 더욱 좋게 만드는 데 쓰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왜 세상을 더욱 좋게 만들고 싶은가? 결국 이타적으로 보이는 목적 뒤에도 "내가" 인생에서 유의미한 일을 했다는 성취감과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욕구가 있었다.
이 깨달음을 통해 세운 삶의 한 가지 원칙은 "어떤것이든지, 나에게 만족과 행복을 주는 유의미한 일인지 생각할 것"이다. 당연한 말인 듯하면서도 평소에 놓치기 쉬운 관점이었다. 시간을 빼곡히 채워서 쓰지 않으면 - 그것이 일하는 것이든 노는 것이든 - 그만큼 발전할 수 있는 시간을 놓치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뒤쳐질거라는 생각에 불안해하는 나였다. 하지만 내가 "열심히 사는" 기준을 다른 사람에게 둘 수는 없다. 나의 성취감과 행복이 내 모든 행동의 뿌리에 있는 욕구라면, 그것이 앞으로 내릴 삶의 여러 선택의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었다.
아직 일을 시작한 지도 이 직무를 경험한 지도 오래되지 않았고 앞으로 인생의 많은 날들이 남아있기에 지금 세운 원칙이 앞으로 계속 불변하리란 보장은 없다. 앞으로 다양한 경험이 삶에 더해지면서 원칙도 새로 생겨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나는 세 가지를 항상 염두에 두고자 한다 - 제품을 만들 때에는 목적을 계속 확인할 것, 일을 할 때에는 신뢰를 쌓을 것, 그리고 삶에서는 나의 성취감과 행복을 기준으로 삼을 것. 마음이 불안하거나 걱정이 많아지는 순간이 올 때, 그리고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나만의 원칙들이 흔들리는 나를 붙잡아줄 것이다.
여러 사람이 모여 자기 소개를 하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누군가 "삼성 다녀요"라고만 얘기해도 같이 있는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삼성이 어떤 회사고 무슨 제품을 만드는지, 그 기업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변호사에요"라고만 이야기해도 마찬가지이다. 변호사라는 직업이 가진 사회적인 권위와 변호사가 되기까지의 어려운 과정에 대해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반면 내가 자기소개를 하면 시간이 더 필요하게 마련이다. 투자도 꽤 받았고 몇 백만 월간 사용자수를 가지고 있는, 업계에서 꽤 인지도가 있는 회사이지만, 대부분의 친구나 지인들은 회사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 회사, 서비스, 내 직무 모두 생소하기 때문에 내 설명은 길어질 수밖에 없다. 회사의 인지도나 직업의 명성에 기댈 수 없는 날 것의 '자기' 소개가 된다.
이렇게 나는 스타트업에서 일하며 자연스럽게 '나'라는 브랜드를 어떻게 만들어갈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었다.
한 가지 방법은 만들고 있는 내가 일하고 있는 스타트업이 잘 성장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유명해지는 것이다. 그 상황에서는, 회사가 유명해지기 전부터 합류해서 같이 일했다는 사실만으로 자연스럽게 'OO 초기 멤버'와 같은 브랜딩이 이루어진다. 특히 내가 그 서비스 성장에 직접적으로 큰 기여를 했다면 'OO를 성공시킨 사람'으로 알려질 것이다. 일에 욕심이 많은 사람으로서 그 성과는 분명 이루고 싶은 목표이다. 하지만 이 역시 '나'라는 사람이 회사의 인지도에 묶여있는 셈이다. 만약 내가 모두가 인정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과연 자신감을 가지고 자기소개를 할 수 있을까? 더 나아가서, 내가 어떤 조직에 속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나를 표현할 수 있을까?
평소와 다른 모습이나 캐릭터를 의미하는 신조어 '부캐'에서 위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얻었다. 회계사라는 본업이 있지만 특정 회사를 비즈니스·재무적으로 분석하는 뉴스레터를 발행하고 있는 사람, 대기업 마케터였으나 그만두고 작가·유튜버로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 등 지금 시대에는 다양한 자아와 업을 가지고 활동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렇게 내가 여러 개의 '부캐'를 가지고 있다면 회사 명함을 걷어내도 온전한 '나'를 지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나는 한 회사에서 10대 대상의 앱을 만드는 PO를 하고 있고, 앞으로 다양한 사용자들을 대상으로 많은 제품을 만들어보며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을 더 잘하고 싶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렇게 스타트업에 오기까지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일하면서 가지는 다양한 생각들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 또한 나에게 중요한 일이자 나의 '부캐'를 표현해준다. 본업의 첫 단추를 스타트업 세계에서 '잘못' 끼웠지만, 내가 입을 수 있는 옷이 한 벌은 아니지 않은가. 앞으로도 일과 조직 안팎으로 나의 다양한 모습을 발견하며 여러 가지 옷을 입어보는 과정이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 '나'라는 사람의 브랜드를 만들어줄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