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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쾌한글쟁이 Feb 15. 2024

꽃은, 목소리는 없지만 말이 있어.

아무 날도 아니지만, 꽃을 샀다.

내 삶의 첫 F

내 삶에서 처음으로 'F'를 받은 건 학부 재학 당시 '법철학, 세법' 두 과목이었다.

(세법 문제풀 때 계산기라도 주시면... 안될... 까요? ^ ^ 요즘엔 주나?)

결국 방학엔 계절학기를 듣고 다시 시험을 치르느라 끙끙대야만 했었다.

수가 유난히 취약한 나는 평소에도 두 자릿수가 넘어가면 암산을 포기해 버린다 ^ ^

특별하게 잘하는 것도 없고 그렇다고 아예 바닥도 아닌 나는 늘 모든 게 '턱걸이'였다.

(그렇다고 턱걸이는커녕 매달리기를 잘한다는 말은 아니다.

까마득한 학창 시절 체력장 철봉 매달리기(남학생은 턱걸이)를 0,1초 버티지 못해

눈물을 글썽여 선생님이 은근슬쩍 3초!라고 외쳐주신 적도 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지쳐 있었다.      

전화벨이 울리거나 SNS 알림이 오면 확인하기도 전에 심장이 덜컹거렸다.

점심 식사를 하며 내일 점심 메뉴를 고민하던 내가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았고,   

몇 시간을 앉아도 단 한 줄도 써내지 못했고,

루틴처럼 무리 없이 해내던 일들에 실수로 균열이 생기고,

같은 페이지의 책장을 몇 시간째 넘기지 못하고 있었다.

철렁 내려앉은 심장과 함께 나의 자존감도 바닥에 떨어져 뒹굴고 있었다.

오늘 80점짜리 글을 쓰면, 내일은 85점짜리 글을 써내야 했다.

그렇다고 100점짜리 쓰면 끝나는 것도 아니었다, 다음은 101점짜리 글을 써야 했으니까.

나는 매 순간순간 애쓰고, 마른 수건에서 물기를 짜내듯 얼마 남지 않은 힘을 쥐어짜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힘들어." 어렵게 꺼낸 말은

'나는 말이야~ 그건 아무것도 아냐~ 넌 너무 나약해.'라는 말로 돌아왔다.

어느 날, 나는 그냥 차라리 부유하는 먼지가 되고 싶었다.

그때의 난 죽고 싶었지만, 살고 싶었다.

<3평 남짓한 작은 공간에 마트리카리아 향기가 가득했다>

돈가스를 아무렇게나 썰어 입에 넣고 우는 날 보던 지인은 병원 진료를 권유했다.

그렇게 난 또 'F'를 받았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모든 SNS 계정을 탈퇴하고, 모든 단톡방을 조용히 나간 뒤 휴대폰의 전원을 껐다.

혈액검사, MRI, 웩슬러 검사 등 여러 검사를 하고 2주일에 한 번씩 약의 용량을 맞추는

날들이 이어졌고, 어느 정도 안정이 됐다는 전문의의 판단으로 심리상담도 함께 진행되었다.

어릴 적부터 시키는 대로 잘 따르는 수동적인 난, 모든 과정을 모범적으로 잘 따랐기 때문에

처음 전문의가 예상했던 기간보다 더 빨리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다는 최종 판단을 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려고 하니 마치 '끼어들기'를 하는 것처럼 어색한 기분이 드는 거였다.

나는 (어쨌든) 무례하게 그들의 일상에서 빠져나와 버렸고,

영문도 모른 채 나의 안부를 확인하는 지인들의 연락을 외면하고 있었으니까.

고민하는 동안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그리고, (한국방송작가협회) 선생님에게로부터 다시 전화가 왔다.

"요즘 좀 어때? 다음 같이 모여서 점심 먹으려는데 너도 오면 좋을 것 같아 전화했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 거면 더 기다리고. ㅇㅇ아, 네가 널 포기해도 우린 절대 널 포기하지 않아!"


심리학자 솔로몬 애쉬가 수행한 유명한 연구인 '상황의 힘'을 보면,

개인을 강하게 만드는 힘은 수십, 수백, 수천 명이 아닌 '내 편 한 사람'이라고 한다.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엄마'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나에겐 스승을 선배를 동료를 친구를 만들어 주셨나 보다.


오랜만에 청바지를 입고 운동화를 신었다.

(병원과 상담소를 오갈 때 트레이닝 바지에 크록스를 끌고 다녔었다. 마치 환자복처럼)

만나기로 한 역에서 내려 장소를 찾아가는 길엔 꽃집이 있었다.

기념일도 아니고, 아무 날도 아니지만 꽃을 사기로 했다.

<꽃보다 아름다운, 작가님들~ 고맙고 사랑합니다>

꽃은 목소리는 없지만 말이 있다.

고마워요, 사랑해요, 존경합니다, 힘내요, 응원합니다 등등...

그래서 우리는 기념일이나 특별한 날에 꽃을 선물하기도 한다.


어색해하는 나를 아무 일 없던(?)것처럼 반갑게 맞이해 주는 일행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은데, 또 망설이고 고민하다 타이밍을 놓칠 것 같아

꽃으로 대신했다.

꽃을 받으며 꽃보다 더 예쁘고 싱그럽게 웃는 일행들의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힘이 느껴졌다.

꽃 선물 신기하다, 받는 사람도 주는 사람도 기분이 좋아진다. ^ ^


혹시, 오늘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소리 내 꺼내지 못할 것 같으면

꽃을 선물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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