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지구에서 한아뿐> & 인도 영화 <바르피>
얼마 전 정세랑 작가의 <지구에서 한아뿐>을 읽었다. 늦은 밤 살짝 펼쳐 든 책의 흡입력은 어마어마했고, 잠에 들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책갈피를 꼽았다. 작가가 오래전에 썼던 버전이었다. 조만간 최근 2019년에 작가가 수정 보완해서 재출판한 버전을 읽어야겠다. 그렇게 한 소설가가 지난 10년의 시간 동안 어떻게 성장하고 관점이 변화해 왔는지 궤적을 함께 읽어 나갈 생각을 하니 이미 설렌다.
그리고 아주 우연히도 며칠 뒤, 친구가 무한 추천해 준 영화 한 편을 보게 되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봐요! 분명 좋아할 꺼에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에요!"
인도 영화 덕후인 그녀는 내게 이 영화를 아묻따 추천해 줬다. 그 어떤 힌트도 주지 않은 채, 마치 비장의 무기를 건네주는 것 같은 미소를 자신 있게 띠면서. 나는 이 영화가 스릴러인지 로맨스인지 흔하디 흔한 발리우드 영화인지도 모른 채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두 시간 반 내내 이 영화가 끝없이 계속되기를 바랐다.
지나고 보니 두 작품은 묘하게도 같은 얘기를 건네고 있었다.
사랑의 따스함.
외면에 상관없이 완벽한 사랑은 존재한다는 사실.
<지구에서 한아뿐> - 한아와 경민의 이야기
한아의 오랜 남자친구 경민. 그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 하나로 자신의 삶을 떠받치고 있는 사람이다. 10여 년에 가까운 연애를 붙잡고 있는 쪽은 한아 자신이라는 생각에 그녀는 계속해서 지쳐 가기만 한다. 하지만 그 와중에 남자친구 경민이 외모만 그의 모습을 하고 있을 뿐, 그 안에 전혀 다른 인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것도 외.계.인.
이 어이없는 상황을 유쾌하면서 가뿐히 넘길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둘, 한아와 외계인 경민의 사랑이었다. 특히 상상 불가한 상황에서 한아의 마음을 움직인 건 새로운 경민의 너무나 순수하고 오랜, 한아를 향한 완전한 마음.
한아는 오랜 연애에서 느끼지 못했던 편안함과 설렘, 상대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진정한 사랑의 느낌을 처음으로 찾아간다. 그녀의 진실된 사랑을 만난 것. 외계인 경민은 한아만을 바라보고 엄청난 고통과 희생을 감내하면서 지구로, 그녀의 곁으로 왔다. 모두 상대를 온전히 바라보고 자신의 마음 안에 들일 수 있을 때에만 일어날 수 있는 일. 아니, 진정한 사랑을 얻기 위한 필수 조건.
“여기에 왔어. 2만 광년을, 너와 있기 위해 왔어.”
"우주가 아무리 넓어도 직접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야기들이 있으니까."
“네가 내 여행이잖아. 잊지 마.”
“바보 같다고 생각 안 해. 한 번도 너 바보 같다고 생각한 적 없어. 넌 같은 자리에 있는 걸 지키고 싶어 하는 거잖아. 사람들이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들을. 난 너처럼 저탄소 생활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
- 한아의 아름다운 마음의 가치를 알고 그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할 줄 아는 외계인 경민의 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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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떨어져 있어도, 심해를 헤매고 있어도 이어져 있는 보고 싶음이었다.'
'경민이 한아를 사랑하면, 그 별 전체가 한아를 사랑한다고 했다. 한아 역시 어째선지 우주를 건너오는 그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까 결국 한아에겐 지금, 여기, 이 입술밖에 없었다. 멀리 날아온 입술. 한아를 중심으로 공전하는 입술. 떠났다가도 돌아오는 입술. 오로지 한 사람을 위해 조각된 입술. 그 감정적인 입술이 가짜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흔하지 않지만 어떤 사랑은 항상성을 가지고, 요동치지 않고, 요철도 없이 랄랄라 하고 계속되기도 한다.'
- 온전한 사랑을 하고 있는 한아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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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흐른다. 그들은 오랜 시간 동안 그야말로 백년해로하며 여전히 상대로 인해 풍요롭고 따스한 일상을 누린다. 한아가 마지막 순간을 맞이할 때까지. 하지만 경민은 그녀와 평생 끝없이 사랑을 지속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한다. 아니, 이미 궁리해 두고 실행에 옮길 참이다. 그렇게 둘은 끝까지 평소처럼 유쾌하게 그들답게 지내간다.
<바르피 Barfi> - 바르피와 질밀의 이야기
바르피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한다. 그렇게 태어났다. 늘 동네에서 말썽을 피우는 중심에 그가 있지만 결코 밉지 않은 사랑스러운 사람. 유쾌한 천성으로 도리어 마을 사람들의 지지를 얻고 있는 타고난 장난꾸러기다.
바르피는 자신의 마을로 이사 온 슈루티를 보고 한눈에 마음을 빼앗긴다. 서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깨달은 바르피와 슈루티. 하지만 슈루티는 가족의 반대와 평범하게 안정된 삶에 대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바르피를 선택하지 못한다.
바르피와 서사를 이어 가는 또 한 명의 여인, 질밀. 질밀은 자폐 증상을 갖고 있다. 미스 유니버스 출신의 아름다운 프리앙카 초프라가 이렇게 연기를 잘하는지, 이렇게 사랑스럽게 캐릭터를 소화할 수 있는 배우인지 처음 알게 되었다. 이 둘의 삶은 히말라야 산자락 마을 다즐링에서 따스한 생기와 사람 사는 냄새 그득한, 내가 인도에서 가장 사랑하는 도시 꼴까따(캘커타)로 이어진다.
바르피의 마음을 완전히 움직인 것은 질밀의 '진심'이었다. 그를 향한, 오직 바르피밖에 모르는 그녀의 단단한 마음. 바르피는 가로등 테스트를 통해 곁의 사람들의 마음을 가늠하려 한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통과하지 못했던 테스트. 모두 바르피보다는 자신의 안전이 우선이었기에. 하지만 가로등이 넘어가는 순간에도 질밀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인식조차 못하고 있었다. 오로지 바르피만 바라보며 그의 손을 꼭 잡고 있었기 때문에.
바르피도 그제야 질밀을 알아보게 된다. 둘의 소소하면서 귀여운 사랑을 보는 재미가 아주 크다. 영상은 얼마나 사랑스럽고 아름다운지.
슈루티의 상황과 대조되며 둘의 순수하고 거리낌 없는 사랑은 더욱 부각된다. 슈루티는 자신의 사랑에 용기를 내지 못했던 과거의 자신을 자책하며 뒤늦게 읊조린다. 그녀는 바르피와 함께 하면 침묵 속에 살게 될까 봐 두려웠다고. 하지만 지금 침묵 속에 살고 있는 건 오히려 남편과 말 한마디 없이 무미건조하게 살아가고 있는 자신이라고.
바르피와 질밀이 평생토록 지켜가는 유쾌하고 따스한 사랑. 그들의 아름다운 사랑의 서사는 마지막 장면에서 완성된다. 이보다 더할 수 없는, 그들의 사랑에 관한 확언에 가까운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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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랑이 우리 삶의 마지막 구원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완전히 회의적인 것도 아니다.
결국, 비슷비슷하게 돌고 도는 삶 안에서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 따스한 것은 사람에게서 오는 기적일 테니까.
그 사랑 말이다.
모두에게 완벽한 사랑은 존재한다는 것.
그 사랑이 우리 삶을 떠받치는 가장 강력한 구원이 될 수 있다는 것.
사랑의 단단한 진심을 믿고 온전히 자신의 마음을 따라가는 용기를 낼 수 있을 때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
이 겨울 마음을 따스히 데워준, 묘하게 닮아 있던 사랑스러운 두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