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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세 Mar 30. 2018

두 번 보는 영화

그걸 또 봐?

그걸 또봐?

그걸 또 봐. 또 보고 싶으니까. 



나는 새로운 이야기를 좋아해서 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는 경우는 드물다. 가끔 과거에 좋게 본 영화가 잡지나 방송, 사석에서 언급되면 그 영화의 분위기와 이미지를 곱씹어 보기는 한다. 어떤 영화는 강렬한 대사나 장면이 기억 속에 남아있고, 어떤 영화는 특정 배우만 떠오르고 또 어떤 것은 영화를 봤다는 것만 확실할 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유년 시절의 기억처럼, 내가 직접 겪은 일인데 구체적이지 않고 모호하다. 그러면서도 부분적으로 생생하고 아련하게 미화되어 있다. 


같은 영화를 두 번 보지 않는 이유 중에 가장 유력한 것은 물론 귀찮음이겠지만, 최초의 감상을 그대로 보존하고 싶은 마음도 크게 작용한다. 얼마 전 소설 <달과 6펜스>를 십여 년 만에 다시 읽고 조금 후회스러웠던 일이 있었다. 예전의 혈기왕성하고 젊었던 나는 그림에 자기 인생을 몽땅 바친 예술가에게 반했었지만 생계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있는 지금의 내 감상은 많이 달라졌다. 내면의 예술혼에 이끌려 모든 인간적 생활을 포기하고 고립되어야 했던 그 예술가를 연민하고 있는 지금, 나는 작품을 풍성하게 해석하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내가 느꼈던 최초의 강렬함을 조금 잃게 되었다. 다시 읽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면 나는 아주 오랫동안 그 뜨거웠던 느낌, 심장이 벌컥벌컥 뛰었던 그 감각으로 이 책을 기억했을 것이며, 가끔 그 예술가를 떠올리며 힘을 얻기도 했을 것이다. 그 소설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닐 지라도, 나는 내 미숙한 오해 속에서 만족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작품에 대한 해석이 시간이 감에 따라 풍성해지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겠다. 훌륭한 작품이란 보는 이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 여지와 깊이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떤 작품이든 볼 때마다 감상과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그 작품을 보는 나 자신이 변했기 때문에 작품은 달라진다. 심지어 오해의 여지가 거의 없는 오락영화 같은 쉬운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어쩌면 좋아하는 작품은 여러 번 보는 것이 그 작품을 제대로 사랑하는 방식이 아닐까 한다. 내 경우처럼 한 번만 보는 경우는 반쪽짜리 사랑이라고 할까, 첫사랑을 아름답게만 기억하고 싶은 욕심이라고 할까. 첫사랑을 아름다운 추억으로만 간직하고 싶은 것은 상대를 내가 기억하고 싶은 어떤 이미지나 환상 안에 가두는 일이다. 진짜 그 상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별로 알고 싶지 않다. 환상이 깨지면 내 소중한 추억까지 사라지니까. 하지만 첫사랑을 참사랑이라고 할 수 없는 건, 사랑의 말랑말랑한 표면 뒤에 숨은 너저분하고 지저분하고 처절하기까지 한 사랑의 속내가 비어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제대로 알기 위해선 화려한 포장 말고 그 속에 숨은 깊은 뜻까지 알아야 하는 것 아닐까.



어제 <펀치 드렁크 러브>를 다시 보았다. ‘분위기가 독특하고 환상적이며 제정신이 아닌 주인공이 나오는 사랑 영화’라고 기억하고 있는 영화였다. 하지만 다시 보면서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예전에는 남녀가 서로에게 사랑에 빠지는 마법 같은 순간에 포인트를 맞췄다면 지금은 ‘오해를 넘어선 사랑’에 초점을 맞췄다. 주인공 ‘배리’는 누가 봐도 이상한 남잔데 사실은 이상한 남자가 아니다. 자기만의 독특한 논리와 의식의 흐름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상한 행동을 하긴 해도 나쁜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그 이상한 행동이 지나칠 때가 있어서 그 난해함까지 포용하며 배리의 본심을 알아줄 여자는 없을 것만 같다. 그런데 ‘그런 여자’인 ‘리나’가 나타난다.


내가 어제 반한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었다. 단점 투성이인 누군가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해주는 누군가.

 나는 양쪽 모두의 입장에 감정 이입한다. 




1. 단점 투성이인 나를 오해 없이 받아들여줄 사람이 있다면 모든 일을 내던지고 하와이까지 날아가리라. 

2. 내가 이제 막 알게 된 남자가 폭력적이고 괴상하고, 폰섹스까지 했다는데 나는 과연 이 모든 장애를 뚫고 그 남자의 본모습을 알아봐 줄 수 있을까.



예전의 순수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나였다면, 그 남자에게 ‘꽂히는’ 어떤 요소가 있다면 무작정 빠져들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나라면 모든 요소가 감점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폭력적인 남자를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이것은 내가 세상을 너무 많이 알게 되었기 때문에 사람을 해석하는 기준이 너무 많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너무 많이 알면, 너무 몸을 사리게 된다. 


사람을 보는 안목이 오히려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장애물로 작용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은 영화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이건 내 취향이 아니다, 이건 클리셰가 너무 많다, 이건 너무 편향적이다... 등등등. 하지만 반대로 별거 아닌 영화를 발굴할 수도 있게 된다. 안목이 있다는 건 그렇게 장단점이 커진다는 것이고 언제나 자신의 편입견을 경계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어떤 주제를 말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기에 요지가 흔들리고 있지만, 글을 쓰다 보니까 느껴진다. 결국 나는 ‘모르는 게 약이다.’ 보다는 ‘아는 게 힘이다’ 쪽으로 끌리고 있다는 것. 그러니까 좋은 영화는 여러 번 봐서 거기서 다양한 메시지를 끌어내는 편이 좋다는 것. 그리고 다시 드는 생각인데, 좋은 영화를 다시 볼 때 꼭 새로운 감상을 느껴야 할 필요도 없는 것 같다. 예전에 느꼈던 그 향수만을 느끼고 돌아와도 좋다. 내가 푹 젖어 있었던 그 세계관으로 도망쳐서 현실도피를 하는 것. 그 정도만 되어도 영화 재관람은 시간 낭비가 아닌 새로운 세계로 잠깐 떠나는 여행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오늘 <콜미 바이 유어 네임>을 다시 볼까 고민해본다. 그 영화의 나른함, 강렬한 햇살, 시 같은 대사를 음미하고 싶어서 다시 보고 싶다. 두 시간을 온전히 내 취향의 세계에 바치고 싶다. 영화관에 앉아 있지만 뜨거운 이탈리아에 있는 느낌. 아무래도 다시 봐야겠다.






<펀치 드렁크 러브> 좋아하는 대사 모음


"하와이 가려면 푸딩을 더 사야 돼. 이상한 소리 같지만 이상한 일 아냐."
"푸딩만 사면 세상 어디든 갈 수 있다니, 웃겨. 정말 웃겨."
"난 당신 얼굴을 한 대 치고 싶어요. 당신 얼굴은 망치로 묵사발을 만들고 싶을 만큼 예뻐요."
"난 당신 얼굴을 씹어 먹고 눈알을 파내 빨아먹고 싶어요."
"일은 없어요. 당신 때문에 온 거예요."
"나한텐 당신이 모르는 힘이 있어. 난 사랑이 있어. 그게 날 얼마나 강하게 하는지 당신은 상상도 못 할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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