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ook Jan 17. 2021

응당 신규 교사라면

전직 초등교사가 쓰는 퇴사기입니다. 흔히 교사는 사직, 퇴직 또는 의원면직이라고 하지만, 그만둔 게 단지 교직만은 아니기에 여러 직장에서의 퇴사기를 이어나가려 합니다. 순서는 들쭉날쭉. 재미는 없어요.




OO동의 바로 그 학교에 관해 이야기하는 건 너무 이르다. 어쩌면 영원히 때가 오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다수의 치부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그 치부의 대부분은 나의 것이다. 나는 당시 일어났던 일들을 아주 우화적으로 풀어내는 상상을 하곤 하는데, 모든 상상은 실패하고 만다. 그 순간들은 적나라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것과도 같아서 우화적인 수사는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차라리 다른 이야기를 먼저 해보자. '신규 교사가 해야 할 일' 따위의 이야기 말이다.


사실 잘 모른다. 신규 교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그저 수업이나 잘하고 아이들과 잘 지내면 될 일이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힘들었다. 교사를 그만둘 때까지 쭉 그랬다. 하지만 정작 더 큰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신규 교사에게 맡기지 말아야 할 일'을 신규 교사인 내가 온통 도맡아야 했다는 것이다. 


내 생각에 신규 교사에게 맡기지 말아야 할 일은 대충 다음과 같다. 첫째 체육부장이다. 아무리 학교가 작아도 신규에게 단위 업무 하나를 책임지라는 건 너무한 처사다. 게다가 체육 업무다. 발령 첫 주에 체육부장 회의에 참석하라는 말을 받고 교육청으로 첫 출장을 갔다. 물론 말이 회의지 가서 참석 서명만 하면 끝인 일이었지만, 그래도 말도 안 되는 일인 건 마찬가지다. 둘러보니 나 말고도 파릇한 신규 몇 명이 여럿 더 보이긴 했다.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둘째 청소년단체 지도교사다. 물론 웬만한 학교에서는 청소년단체 지도교사가 서넛은 있고 못해도 둘이다. 거기에 주무가 아닌 보조로 참여하는 신규 교사는 많다. 그런데 신규에게 주무를 시키면 다른 이야기가 된다. 나는 바로 그 다른 이야기 속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했다. 다행히도 학교에 청소년단체가 하나 더 있었고 그 단체의 주무 선생님께 많은 도움을 받았다. 아니, 생각해보니 다행히도 아니라, 당연히도. 신규에게 뭘 믿고 연회비 20만원 돈을 내는 단원 20명을 맡긴단 말인가. 11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봐도 어이가 없는 일이다. 학교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작년에 이어 하고 싶어하는 학생들은 있는데 맡고 싶어하는 교사가 없으니 아무것도 모르는 신규를 끌어다 놓는 수밖에.


셋째 위 두 일을 동시에 맡는 한 그 외 추가적으로 주어지는 모든 일 하나하나가 더 이상 신규에게 시켜서 안 되는 일이다. 예를 들어보자. 방송 업무다. 내가 믹서 만질 줄 아는 건 어떻게 알고 방송부를 맡겼는지. 그때 방송부원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기억도 안 난다. 방송조회를 위해 헐레벌떡 뛰어다녔던 기억만 난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방과후교실 강사다. 방과후교실이 우리 학교 역점 사업 중 하나였다. 모든 학생이 하나 이상의 방과후교실 수업을 듣도록 권장했던 것 같다. 그리고 모든 교사가 하나 이상의 방과후교실 수업을 맡도록 강제했다. 그러나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 그리고 언제나 어느 조직에서나 신입에게는 예외가 없는 법. 나는 통기타교실을 억지로 만들어서 2학년 1명, 5학년 2명을 데리고 기타를 가르쳤다. 내 기억에 그 2학년은 거기가 뭐하는 데인지도 모르고 부모에게 등 떠밀려 왔던 것 같다. 


하나만 더 들어보자. 특색사업 주무다. 교장 선생님이 서울시 사업예산을 5백만원 정도 따왔다. 자전거 문화교육을 서울시에서 밀었던 때다. 난데없이 5백만원이 내게 주어졌다. 절반은 자전거를 샀고, 절반은 학생 몇몇을 모아 자전거 하이킹을 나가는 데 썼다. 받은 돈은 꼭 써야 한다길래 억지로 행사를 만들었다. 아니 급조했다. 아참, 자전거 한 대는 교장 선생님이 가져갔다.


이 모든 일이 신규 때 1년 동안 한 일이다. 그런데 정말 어처구니없게도 첫 1년 동안 제일 하기 싫었던 일은 따로 있었다. 바로 3학년 2반 체육 수업이었다. 그리고 3학년 2반 음악 수업이었다. 6학년 1,2,3반 도덕 수업도 그랬다. 5학년 2반 컴퓨터 수업, 4학년 1,2,3반 음악 수업, 2학년 1반 컴퓨터 수업. 이 수업들만 안 해도 된다면 '신규 교사에게 맡기지 말아야 할 일' 따위는 그 두 배를 줘도 할 의향이 있었다. 신규가 마땅히 해야 할 일, 즉 수업이나 잘하고 아이들과 잘 지내는 일보다 훨씬 수월했다. 이후로도 내내 나를 괴롭혔던 소위 '수업'과 '업무' 사이 지독한 갈등이 시작된 것이다.


수업이 뭐가 그리 힘들었을까? 그리고 그만두는 그 순간까지도 왜 나는 수업의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했을까? 그저 나는 수업보다는 업무가 더 편했던 것 같다. 그러나 교사로서 수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나를 옭아맸던 것이다. 수년이 흘러 왜 교사를 그만두었는가를 돌이켜보면 결국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신규 교사가 해야 할 일을 해내지 못해서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고. 


* 업무가 더 편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일을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24살짜리가 잘하면 얼마나 잘했을까. 그중에서도 자전거 문화교육은 이후 직장생활 내내 나를 괴롭힌 또 하나의 문제인 불안의 일상화를 처음 경험하게 한 일이었다. 당시 나는 이 사업 예산을 다 써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다. 급기야 길 가다가 삼천리 자전거 대리점만 봐도 학교 일이 생각나 불안해질 정도였다. 지금도 자전거 대리점을 보면 그때의 불안이 떠오른다. 나중에도 비슷한 일이 종종 있었다. 일상에서 일과 관련된 것을 마주치면 업무가 떠올라 스트레스를 받곤 했던 것이다. 재밌는 건 이후 일상에서 업무로 인한 불안을 마주할 때마다 거꾸로 자전거가 떠오른다는 사실이다. 나를 불안의 늪에 처음으로 빠지게 했던 삼천리 자전거 30대가.

매거진의 이전글 아니 그럴 리 없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