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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ngers May 11. 2024

나의 첫 기억.

[나의 이야기]


내가 기억하는 첫 기억은 한 골목에 사는 내 모습이다.


그 골목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


한 골목에 3개의 슈퍼가 있었고, 


지나가는 어른들에게는 항상 인사를 드렸다.


어른들은 항상 반갑게 인사를 받아주셨다.


“어? 씩씩이네!”


라고 말씀하시며 말이다.


내 별명이 씩씩이인 이유는 태어날 때 우량아였기 때문이다.


내가 태어나던 해에 초량 침례 병원의 Top5에 들었다고 하니까.


아, 나는 4.5kg이었고, 


우리 어머니는 자연분만으로 이틀 동안 1.5리터의 피를 흘리시며 나를 낳으셨다고 했다.


나는 그것 만으로도 불효를 한 것이긴 하다.



대부분의 사람이 자신의 태어날 때 기억이 없다.


나도 마찬가지고 내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사진으로 보면 나는 참 컸다.


어머니가 얼마나 고생하셨는지 보일만큼 말이다.


이것만으로도 나는 효자가 되어야 한다.



잠깐 내가 기억나지 않는 시절의 스토리를 하고자 한다.


나의 할아버지께서는 미남로터리에 있는 광혜병원 뒤에 집을 가지고 계셨다고 한다.


어찌 선견지명이 있어서 그 땅을 사셔서 집을 지으셨는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그 집을 꽤 큰돈을 받고 파셨다고 들었다.


그런 걸 보면 사업수완이 있으신 거 같지만,


서면땅은 사시지 않은 것을 보면 아닌 거 같기도 하고 그렇다.



나의 아버지는 똑똑하셨지만 경제적 능력이 그렇게 좋지 않으셨다.


범죄의 도시 한 장면처럼 20대 초반의 어른 어머니를 꼬셔서(?) 결혼하셨지만,


가진 게 없으니 할아버지 댁에 함께 사셨다고 한다.


내 나이 3살 이전의 사진을 보면 할아버지댁에서 찍은 사진이 많다.


근데 볼이 어쩜 그리 통통한 것인지,


역시 우량아는 다르구나 싶다.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1911년생이신 할아버지가 늦둥이로 44세 보신 아버지가 자식 중에 2번째 아들이었는데,


모든 자식 중의 첫째인 큰 아들보다 똑똑했지만 공부를 안 했어서라고 들었다.



하지만 내 기준에서는 할아버지의 잘못이 크다고 생각한다.



첫째로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셨다.


어릴 때 아버지가 내게 종종 말씀하신 게 있었다.


“할아버지는 술과 담배를 즐겨하셨는데,


연세 50에 그걸 그만두셨다.


그리고 일도 그만두셨고 그 뒤로 가진 재산으로 평생을 여유롭게 사셨다.”


아직 세상에 대한 기준이 없는 7살 아이에게 아버지가 집에서 노는 모습을 보여줬다면,


그건 분명 좋은 가정교육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아버지 말씀으로는 20살 때부터 사업을 하셨던 할아버지는 정말 피나는 노력을 하셨다고 한다.


20살부터 건설 사업을 하셨고, 보루꾸 몇 개와 시멘트로 몇 평의 몇 층 짜리 집을 지을 수 있는지 아셨다고 했다.


왜 그 어려운 형편에 부산상고(현 개성고)를 나오실 수 있었는지,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학교가 부산상고라고 알고 있고, 


내가 존경하는 3분, 할아버지, 노무현 대통령, 셋째 고모부가 나오신 학교이다.)


사회생활을 하며 알 수 있었다.



둘째, 할아버지는 기준이 너무 높으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할아버지 유품을 정리한 적이 있다.


아버지가 막내셨지만 우리 집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셨기 때문이다.


그 유품 중에는 큰 아버지가 할아버지께 보내신 편지가 있었다.


대략 내용은 이랬다.


“제가 아버지 기대에 부합하지 못하고 수산대에 입학해서 죄송합니다.


앞으로 더 높은 사람이 되겠습니다.”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제 멋대로였지만 나름 공부를 꽤나 하셨고, 군대는 카츄샤를 나오셨다.


항상 제 멋대로였기에 이것저것 해보고 싶으셔서 택시 기사를 하셨는데,


어느 날 그 일을 아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야, 네가 지금 하는 일이 뭔지 아나? 마부다!


그런 일 할 거면 때리치고, 앞으로 돈도 주지 마라.”


아버지는 그때 이후로 더 엇나가셨다고 어머니께 들었다.


자식농사는 참 어렵다는 것을 느꼈다.



셋째 이유는 조금 더 옛날로 돌아간다.


할아버지는 둘째 아들이었고, 울산 출신이셨다.


당신은 증조할아버지가 노름 좋아하셔서 별로 안 좋아하셨다고 했다.


그래서 증조할아버지의 묘가 없으시다.


할아버지 이후로 남자 자식들이 제대로 안 풀린 게 그런 이유 때문인가 생각한 적 있는데,


파묘를 보고 조금 더 확실하게 생각한 적이 있다.


물론 그것을 깨부수는 게 모든 사람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암튼 이렇게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풀어보려고 한다. 

아! 모든 게 사실이 아니다. 

재미를 덧붙인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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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하!

당신만의 의미 있는 인생을 사세요.


유캔두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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