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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한 가장 용감한 일은?

[나를 알아가는 시간]

by Changers

2024년 11월 21일에 퇴근하고 집에 도착했는데, 현관문 앞에 우체국의 등기 안내 종이가 붙어 있었습니다. 발신자는 서울지방법원 형사부였습니다. 평소 선행을 많이 베풀며 살지는 못해도 타인에게 피해는 주지 말자고 살고 있었는데, 적잖이 놀랐습니다. 안내 종이에는 어떤 내용인지 적혀있지 않아서 너무 궁금했습니다. 한참 동안 상상의 나래를 펼친 저는 한 가지 생각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젤리의 제국 대표 그였습니다.


이야기는 1년 반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구로경찰서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처음엔 보이스피싱인 줄 알고 전화를 끊으려고 했습니다. 근데 경찰관이 그의 이름을 얘기하며 고소 사건 관련 진술을 요청했습니다. 고소인이 누구냐고 물으니 젤리의 제국에서 탈출(?)한 여자 디자이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진술에 적극적으로 응했습니다.


그해 연말, 디자이너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자신이 민사와 형사 소송을 준비하고 있는데 도와줄 수 있겠냐고요. 예전의 안 좋았던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일을 선택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지만, 8년 전 그 당시 함께 일했던 iOS 개발자와의 약속(어떤 약속이었는지는 글 마지막에 말씀드리겠습니다.)을 지켜야 했기에 도와주겠다고 했습니다. 며칠 후 디자이너가 담당 변호사님과 함께 찾아왔습니다. 그녀가 겪었던 다양한 일들에 대해 물었고, 제가 기억나는 범위에서 최선을 다해서 답변을 했습니다.


만남이 끝날 무렵, 디자이너와 변호사님이 조심스럽게 제게 부탁을 했습니다. “혹시 말씀하신 내용을 자필 진술서로 써주실 수 있을까요?”라고요. 당연히 써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꼭 소송에서 이기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자필로 쓴 진술서는 며칠 뒤 디자이너와 직접 만나서 전달했습니다. 그 뒤로 디자이너와 한번 정도 더 연락을 나눴고 그 뒤로 어떤 대화도 나눈 적이 없었습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생각하며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랐습니다.


제 삶 속에서 저와 법원에서 엮일 사람은 그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음날, 등기 봉투를 받았습니다. 열어보니, 증인소환장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TV 청문회에서나 보던 증인 소환을 제가 당해보니, 처음엔 좀 놀랐습니다. 영화에서만 보던 법정에 제가 나간다고 하니,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괜히 겁이 났습니다. 하지만 법원의 증인 소환은 거절할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정당한 사유 없이 불출석할 경우, 200만 원의 별금이 부과된다고 했습니다. 저를 증인으로 소환한 법정은 매주 화, 금에 열리고, 시간이 14시였기에 반차를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반차를 쓰고 증인으로 참석하기로 했습니다.


증인으로 소환되는 날 아침, 머리부터 발끝까지 최대한 깔끔하게 꾸몄습니다. 판사, 검사님도 사람이기에 보이는 모습이 신뢰감을 높이는데 도움이 되니까요. 오후 반차를 쓰고 서울지방법으로 향했습니다. 역에 내려서 10분 정도 걸어가니 법원이 보였습니다. 입구에서 소지품 검사를 하고 들어갔습니다. 제가 참석해야 하는 법정은 3층에 있었습니다. 법정으로 가려고 코너를 도는데, 저 멀리서 그가 보였습니다. 그는 담당 변호사 2명과 있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몸을 돌려서 왔던 길로 되돌아갔습니다. 제 본능이 그와의 마주침을 거부했습니다. 1분 정도 지난 후 내가 왜 피해야 하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법정 앞에 가서 입구 의자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13:50에 법정 문이 열렸습니다. 그와 그의 변호사는 피고인석에 앉았습니다. 저는 방청석에 잠시 앉았습니다. 그때 디자이너의 변호사님이 들어오셨습니다. 저와 가볍게 인사를 나눴습니다. 변호사님은 눈빛으로 잘 부탁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도 알겠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증인 OOO님 오셨습니까?”


“네, 왔습니다.”


“그럼 증인석 앞으로 나와주시기 바랍니다.”


“네, 알겠습니다.”


우선 증인 선서를 했고, 피고인 측에서 저에 대한 질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로부터 2시간 동안 증언을 했습니다. 대부분의 질의는 피고인 측에서 했고, 검사 측은 대략 10분 정도로 짧게 질의를 했습니다. 피고인 측의 정확한 질문이 기억나지 않지만, 제게 어떻게 이 법정에 서게 되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때 저는 앞서 말한 iOS 개발자와의 약속을 말했습니다.


“저와 함께 근무했던 iOS 개발자 OOO이 피고인에게 누나들에게 폭언 및 성희롱을 그만해 줬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피고인은 전 직원을 테이블에 앉게 했습니다. 그리곤 여자 직원 3명에게 자신이 폭언을 하거나 성희롱 한 적이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그 누가 맞다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그렇게 대중의 심리를 잘 알고 이용했습니다. 그때 iOS 개발자 OOO는 마녀사냥을 당했지만, 저는 어떤 도움도 주지 못했습니다. 그게 너무 미안했고 죄책감이 컸습니다. 그날 퇴근하고 둘이서 술을 한잔 하며, 정말 미안하다. 나중에 혹시 내가 바로 잡아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때는 절대 피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진술서를 쓰고, 오늘 이 법정에서 증인으로 서게 되었습니다.”



2024년 12월 17일 14시.

제 인생에서 가장 용감한 일을 한 날 중 하나이고, 스스로가 자랑스러운 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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