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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쓴이 May 29. 2022

짝사랑 실패 주의보

 나른한 오후 2시, 대학교 4학년이었던 나는 학교 컴퓨터실에서 자기소개서를 열심히 쓰던 중이었다. 아니, 사실은 쓴다기보다는 완성된 포맷에 껍데기만 바꾸던 중이었다. 돼지고기도 삶으면 수육이고 볶으면 제육이고 구우면 맛있는데 조금씩 바꾸는 게 무슨 상관인가. 다행히도 내가 지원하는 회사는 자기소개서의 정석이라고 부를 만큼 질문이 비슷했기 때문에 깊게 생각하지 않고 여러 회사의 자기소개서를 기계처럼 찍어내고 있었다. 그런데 예상치도 못한 질문 하나가 나왔다. 


 '살면서 가장 실패했던 경험과 이를 극복한 사례를 쓰시오' 

고작 스물몇 살 짜리들에게 실패를 묻는다는 생각을 한 HR 담당자는 누구일까. 아마 그는 실패보다는 '극복한 사례'를 보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거기에 '가장'이라는 수식어는 왜 적었을까. 작은 실패 - 운전면허 실기시험을 떨어졌다 -는 말도 꺼내지 말라는 뜻이었겠지만 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실패했던'경험은 극복하지 못했다. 



  수능이 100일 남은 여름방학, 엄마는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었는지 과외 선생님을 구해다 주었다. '우리 딸은 영어만 잡으면 될 것 같아요'라고 선생님께 말하는 엄마 옆에서 나는 '엄마... 영어도 잡아야 하는 거야'라고 속으로 외쳤다. 수리는 그나마 괜찮았지만, 언어는 쉬운 문제를 계속 틀려서 안심할 수 없었다. 사탐은 원래 방학 때 하는 거라고 해서 이제 막 문제집을 펴본 참이었다. 영어는 도무지 답이 안 보였다. 불안함과 막연함에 녹아내리던 여름이었다. 

 내 '첫'과외 선생님은 과외를 직업으로 하는 전문 강사였다. 그때는 늙어 보였던 그도 고작 30대 초반이었다. 수업 중 쉬는 시간에 병든 닭처럼 조는 나를 보면서 그가 나에게 말했다. '공부하느라 고생 많지? 잠깐 쉴까?' 생각해 보면 그는 수업 시간보다 쉬는 시간을 더 잘 챙겨줬다. 내가 조금이라도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면 잠깐씩 쉬면서 나를 달랬다. '잘하고 있어' '너는 잘 될 거야' '괜찮아 걱정하지 마' ' 지난주 보다 더 실력이 늘어난 것 같아' ' 너는 내가 가르치는 학생 중에 제일 빨리 성장하고 있어' 등등. 그가 나를 독려하려 했던 말을 떠올릴 때면 그 목소리와 공기, 조명까지 같이 떠오른다. 자존감이 바닥을 치던 나에게 그의 말 한마디는 망망대해에 떠 있는 구명튜브 같았다. 

 그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성적이 오르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어 다른 과목은 제쳐두고 영어 공부에 시간을 쏟았다. 여름방학이 끝나갈 때 즈음 목표했던 등급이 나왔고, 선생님은 내가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아, 그 갈색 눈동자. 곱슬머리. 상냥한 목소리. 빌어먹을 수능만 끝나면 당장 고백해 버려야지.




 수능이 끝나고 대학이 정해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9월에 헤어진 그와 이듬해 2월에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그를 만나기 전에 친구와 함께 고백 전략을 짰다. '일단 밥 사달라고 먼저 문자를 보낼 거야, 그리고 밥을 먹어. 메뉴는 파스타같은거로 골라. 먹었을 때 지저분해지지 않아서 좋을 것 같거든. 많이 먹지 말고 서로 얘기하는데 집중한 다음에 타이밍을 봐서 산책하자고 하는 거야. 사람이 드문 공원의 벤치 같은데 앉은 다음에 말하는지. 완벽하지?' 2시간의 회의 끝에 낸 결론을 친구에게 말하고 나니 절대 실패할 수 없는 필승전략으로 보였다. 이날 내 인생에 가장 큰 실패를 할 줄은 몰랐지 나도.

 '선생님'하고 뒤돌아 있는 그를 부르니 내가 6개월 동안 혼자 짝사랑했던 그가 돌아봤다. 이상하게 내 상상보다 조금 더 작고 피곤해 보이기는 했지만 괜찮았다. 우리는 이제 어른의 사랑을 할 거니까. 간단한 안부 인사. 파스타. 공원 산책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과정에서 내 머릿속은 온통 고백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해가 진 저녁, 우리가 앉아있는 벤치 주변에 사람이 없어지는 타이밍이 왔다. 쌀쌀한 공기와 노란 가로등 조명 아래에서 살짝 로맨틱한 기분이 들었다. 이때다. 그를 쳐다보고 입을 열려는데 그가 웃으면서 말했다. '선생님 올해 여름에 결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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