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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규영 Oct 24. 2023

만난 적 없는 선배들이 가르쳐 준 것

일본 홈즈 신문광고 (1977)

운이 좋았는지 첫 회사부터 좋은 선배들을 많이 만났다. 막연한 환상만 가지고 시작한 광고대행사는 배워야 할 것들 투성이었다. 광고의 기본도 모른 채 입사했기에, 아주 기초적인 것부터 선배들의 신세를 졌다. 세세한 것부터 친절하게 가르쳐준 선배들이나, 살갑게 대하진 않아도 자신의 실력으로 광고란 무엇인지 일러주는 선배들까지. 그들 덕분에 빠르게 일을 익히고 적응할 수 있었다.


광고대행사와 프로덕션을 거치면서 많은 선배들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자료를 찾아 정리하는 법, 자료를 분석하는 법, 컨셉을 뽑는 법, 카피를 만드는 법, 이야기에 메시지를 담는 법, 화면을 구성하는 법, 효과적으로 프리젠팅하는 법 등 모두 선배들에게 직접 배우거나 어깨너머로 익혔다.


이렇게 같이 회사를 다니며 프로젝트를 함께 한 선배들 외에도, 나에게는 서로 모르는 좋은 선배들이 많다. 광고 일의 특징은 그 결과가 세상 사람들에게 대대적으로 공개된다는 것이다. 요즘은 타겟 특화된 매체에 특정 타겟에만 집행되는 광고가 많지만, 매스커뮤니케이션이 광고대행사 업무의 주를 이루던 예전에는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결과물이 노출됐다. 광고가 게재된 시점에 보지 못해도, 광고물을 모아 놓은 자료를 통해 한국에서 발표된 광고들을 대부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보게 된 광고들은 모두 나의 공부거리가 됐다. 그 광고들을 만든 만나 본 적 없는 광고인들은 모두 나에게 광고를 가르쳐준 선배와 스승이 됐다.


출처: 채널예스 (https://ch.yes24.com/Article/View/54366)


이를 테면 최인아 대표 같은 분이다. 지금은 광고계를 은퇴하고 최인아책방이라는 문화공간을 운영하고 있다. 1984년에 카피라이터로 제일기획에 입사해, 삼성그룹 최초의 공채출신 여성임원으로 부사장까지 지내며 언론에 많이 소개됐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대표적인 광고인 중 한 사람이다. 카피라이터로서 ‘그녀는 프로다, 프로는 아름답다’,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20대여 영원하라’ 같은 유명한 카피를 많이 남겼다. 최인아 대표의 주옥같은 작품들 중에서 내 광고인생의 하나의 지침이 된 카피가 바로 이것이다


운전은 한다, 차는 모른다


2000년대 초반에 만들어진 스피드메이트의 TV광고 카피이다. 배우 이미연이 모델이었다. 도회적인 느낌의 한 젊은 여성이 한적한 시골의 교차로에 멈춰 선 차 본넷 위에 앉아 있다. 아마 차가 멈춘 모양이다. 그 걱정스러운 운전자의 얼굴의 위로 흐른 카피가 '운전은 한다, 차는 모른다'였다. 
 
당시는 차량정비 업체에 대한 불만과 불안이 많던 시절이었다. 이 영상은 스피드메이트가 표준화된 시스템과 투명한 단가공개를 무기로 차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적은 운전자를 대상으로 만든 광고다. 1990년대 들어 자동차 보급률은 높아졌고 운전자도 늘었다. 시동을 걸고 차를 몰고 다닐 수는 있지만, 차에 대한 이해가 적은 사람들도 많아졌다. 이들은, 차량정비업체에 가는 것에 부담이 많았다. 차를 잘 모르기에 불필요한 정비를 받거나, 바가지를 쓸까 봐 걱정이 많았다. 이런 배경에 나온 광고와 카피이다. 오랫동안 운전은 해 왔지만, 차의 작은 문제에 손 하나 까딱해보지 않은 운전자들에게 바로 자신의 이야기가 됐다. 자동차 정비에 대한 백 마디 말보다 강력하게 마음을 움직였다. 운전은 하지만, 차를 모르는 이들이 안심하고 갈 수 있는 정비업체. TV에서 이 광고를 처음 접했을 때, 감탄이 나왔다. 딱, 나의 이야기였다. 내가 스피드메이트에 가야 할 이유를 한 줄로 알려줬다.


동영상보기: 


화려하거나 멋진 문장이 필요하지 않다. 타겟 소비자가 공감하고 마음을 열 수 있는 심플한 한마디면 된다. 카피란 이런 것이다,라고 가르쳐준다. 이 광고를 처음 본 후 20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내게는 카피가 지향해야 할 곳을 알려주는 바이블이다. 최인아 대표는 그의 저서 ‘내가 가진 것을 세상이 원하게 하라’(해냄 2023)에서 이 카피를 포함한 자신의 대표적 카피들이 ‘대단히 새롭지는 않으나 공감과 설득력이 있으며, 실제로 시장에서 작동한 아이디어’였으며 ‘화려하거나 튀지는 않지만 브랜드에 필요한 점을 찾아내 문제를 해결’했다고 밝혔다. 


그가 광고계에 몸담고 있을 때 마주친 적은 없다. 프로덕션의 기획실장으로 일하던 시절에 제일기획의 여러 프로젝트에 참여한 적이 있으나, 그의 팀과는 인연이 없었다. 그의 책방에서 책을 사거나, 북토크 혹은 세미나에서 참여하며 눈앞에서 직접 뵌 적은 여러 번 있으나 정식으로 인사를 나눠본 적은 없다. 그러나, 늘 마음속에는 나에게 광고와 카피를 가르쳐준 선배로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최인아 대표 외에도 좋은 광고와 카피로 영향을 준 선배들이 있다. 업계에 이런 선배들이 있다는 것은 내게도, 광고계로서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내게는 만나본 적 없는 일본 선배들도 있다. 그들의 수많은 명작 카피들 중 내 마음에 처음 들어온 문장을 본 것은 광고계에 처음 입문한 1997년의 일이다. 당시 근무하던 대행사의 자료실에 있던 책에서 발견한 카피였다. 


住まいの88%は空気です。

주택의 88%는 공기입니다



일본홈즈의 신문광고 카피였다. 당시 읽었던 책에는 국문으로 번역된 카피와 광고주명 밖에 없어서 어떤 이미지에 얹어진 문구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번역된 카피만으로도 충분히 강렬한 힘이 있었다. 내가 메모를 해두었다가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가지고 있을 만큼. 


일반적으로 집이라고 하면 외관과 인테리어 같은 것을 생각한다. 그러나 그 넓은 집을 실제로 더 많이 차지하고 있는 것은 빈 공간이며, 그 공간을 메우고 있는 공기가 집의 대부분이라는 생각을 하기 쉽지 않다. 카피 자체는 담백하다. 어떤 화려한 수사도 없다. 좋은 카피는 멋진 문장이 아니라 남다른 관점과 생각이 만든 다는 것을 가르쳐 준 수작이다. 


이 카피가 나온 지 40여 년이 지난 후, 내가 이 문장을 발견한 지 20여 년이 지난 2023년 여름. 일본의 중고서적 플랫폼을 통해 구한 コピー年鑑(카피연감)1977에서 이 광고의 사본을 찾았다. 단정한 양옥집의 실내 장면과 외관 이미지가 담긴 전형적인 70년대 신문광고이다. 긴 바디카피에는 온도조절, 가습, 공기정화 등 공조설비는 주택설계 단계부터 제대로 갖춰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바디카피를 읽고 나니 이 광고의 키카피가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자료를 찾아보니 담당 카피라이터로 사와이 마코토(沢井誠)라는 이름이 검색된다. 1976년에 도쿄카피라이터스 클럽에서 신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작품은 카피연감에 1984년까지 검색된다.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까지 왕성하게 활동한 카피라이터였던 것 같다. 대략 계산해 보면, 지금은 70대를 넘어 일찌감치 광고계를 은퇴했을 것이다.


사와이 마코토 상은 자신이 오래전 쓴 카피를 바다 건너 한국의 한 광고대행사 신입사원이 20여 년 동안 품고 있으며, 광고카피의 나침반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가르침을 받은 한 이름 모를 한국의 후배가 지금도 좋은 광고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기뻐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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