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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거니 Apr 01. 2024

은퇴 직후

오늘은 뭐 하지?

은퇴한 직후, ‘오늘은 뭐 하지?’하면서 공허함을 느낀다면 은퇴준비가 전혀 안된 것이다. 공허함은 어르신의 정신건강을 위협한다. 존재이유가 없는 것이라 당황할 수밖에 없다.


교수님들 중에는 은퇴 직후 교수연구실과 같은 자신만의 공간을 새로 만드는 사람이 있다. 교수가 연구실에서 혼자 무엇을 하는지는 비밀(?)이다. 교수연구실은 일종의 동굴이고 은신처다.( https://brunch.co.kr/@jkyoon/324 ) 우두머리 자리에서 쫓겨난 사자가 혈투에서 입은 자신의 상처를 핥을 수 있는 공간. 그런 공간을 오피스텔이나  원룸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교수연구실에서 하던 일을 계속하려고 한다. 100세를 넘기며 현역때와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 김형석 교수처럼 되고 싶기도 하다.


많은 은퇴자가 산을 찾는다. 이 좁은 한국 땅에도 오를만한 봉우리가 천 개가 넘는다고 한다. 몇 년에 걸쳐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사람도 있다. 이 과정을 거친 사람들은 좀 더 특별한 산을 찾는다. 이 지구상에는 오를만한 산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산을 오르는 과정은 때로는 죽을 수도 있는 상당한 육체적 고통을 동반한다. 굳이 높은 산 정상을 밟겠다는 것이 아니라면 고통의 강도는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다. 모든 노동은 지루함이란 고통을 동반한다. 따라서 산을 오르는 행위도 일종의 의미 있는 노동처럼 간주되는 것이다.


높은 곳에서 산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면, 전지전능하고 영생하는 존재인 신을 흠모한 나머지 자신도 초월한 존재인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래서 사람들이 높은 곳을 좋아하는 것이다. 고층 아파트의 펜트하우스가 그렇게 비싼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스카이다이빙, 열기구, 패러글라이딩 같은 고공스포츠가 인기인 이유도 같을지 모른다. 호텔의 Roof top bar에서 보는 석양은 항상 근사하다. 하늘을 나는 새의 눈으로 지상을 내려다보고 싶은 마음( https://brunch.co.kr/@jkyoon/47 )이 설명되고 이해된다. 따라서 산을 내려오는 발걸음은 가볍기 그지없다. 산 아래를 내려다보며 느꼈던 충만감이 아직 충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 충만감이 바닥나면 다시 산을 찾으면 된다. 다음 날, 다음 주, 다음 달에...


은퇴하고 사회적 봉사(돈이 안되니 아무도 하지 않는, 그렇지만 사회에서 어느 정도 요구되는 일종의 잡다한 일)에서 의미를 찾는다. 남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심지어는 봉사에 대한 보상을 요구한다. 가장 큰 보상은 사회적 인정이다. 보수 없는 사회단체의 회장이나 고문 같은 타이틀에 연연한다. 그런 타이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돈을 써야 한다. 밥이라도 사야 하니까. 봉사는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기에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꼭 자기가 할 이유는 없다. 내가 안 하면 누군가는 할 테니까...


여유 있는 은퇴자들은 여행이나 골프에 탐닉한다. 엄청 좋아했지만 그렇게 긴 시간을 낼 수 없었기에 은퇴 전에는 항상 아쉬웠던 골프나 여행에 몰입한다. 사실 이런 기회 다시 오지 않는다. 건강수명까지 한정된 시간이기에 몰입해서 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기회라며, 할인점에서 50% 할인하는 안 팔린 와인을 가성비 좋다며 여러 병 주워 담는 것과 비슷한 마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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