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돌이 안된 손자는 지금 공룡과 동물에 꽂혀 있다. 유튜브를 보여 달라고 거절할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할아버지 스마트폰을 찾아들고 온다. 내 무릎과 배 위에 더 이상 편할 수 없는 자세를 손자에게 만들어 주고 유튜브 앱을 연다. 가능한 한 매번 새로운 동물 이름을 검색창에 처넣는다.
그 날은 물소였다. 물소가 나오는 유튜브를 섭렵하는 중에 물소와 사자가 싸우는 장면이었다. 시작은 짙은색 갈기를 가진 수사자가 자신의 몸보다 훨씬 큰 물소의 엉덩이를 올라탔다. 예상되는 장면은 사자가 물소를 넘어뜨리고 목을 덥석 물어 물소의 생명줄을 끊는 것이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물소는 넘어지지 않았고 뒷발질을 하며 몸을 흔들었다. 물소의 엉덩이 위에서 사자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쓰럽게 애를 쓰고 있다. 예상치 못한 광경이 한동안 계속 유지된다. 물소는 놀라 도망가지도 않는다. 흔히 보는 동물의 왕 사자가 아니다. 늙고 허기져 기운 없는 사자다. 아마도 작고 빠른 동물 사냥을 포기하고 그래도 상대적으로 느린 물소를 무리하게 공격한 것 같다. 처음부터 사자의 뒷발은 땅을 딛고 있었다. 앞발로 부여 않은 물소의 엉덩이가 너무 커서 사자는 어쩔 줄 모르고 엉거주춤 잡고 있다. 오히려 물소가 엉덩이를 하늘로 차면서 뒷발질을 세차게 해댄다면 복부를 가격 당한 사자가 나가떨어질 판이다. 물소와 사자가 한참을 그 자세를 유지한다. 결국 물소가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자 기운 빠진 사자가 옆으로 떨어져 중심조차 못 잡고 쓰러졌다. 물소의 뒷 발이 사자를 밟아버릴 것 같다. 쓰러진 사자는 아직 고개는 들고 있다. 아마도 예전엔 물소도 잘 잡았는데 오늘은 왜 이러지 하는 표정이다. 너무 배가 고파 기운이 없어 그런가? 아니면 너무 늙어버린 건가?
내가 알기로는 수사자는 암사자 네댓 마리와 산다. 그리고 새끼 사자 여러 마리가 무리 속에서 성장한다. 우두머리 수사자는 나무 그늘에 앉아 달려드는 파리 따위에는 괘념치 않고 위엄을 유지한다. 그러는 동안 암사자들이 무리를 지어 가젤이나 임팔라를 사냥한다. 수사자는 어슬렁거리며 나타나고 정작 사냥하느라 힘껏 달려 맥 빠진 암사자들은 수사자 눈치를 보며 물러난다. 가장 연하고 맛있는 내장을 수사자가 먼저 먹어치운다. 식사를 끝내고 수사자가 자리를 뜨면 암사자와 새끼들이 달려들어 나머지를 갈기갈기 찢어 먹는다.
그렇게 무리를 이끌던 위엄에 찬 수사자가 늙으면 젊은 수사자에게 자리를 빼앗기고 무리에서 추방된다. 늙고 힘없는 수사자는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 주린 배를 채우려면 한동안 안 하던 사냥을 해야 하는데, 노쇠한 수사자의 힘으로 혼자 사냥하기는 이미 무리다.
물소를 공격하다 상처 입은 사자는 결국 누워버렸다. 배를 보니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유튜브는 다행히 거기서 끝났다. 물소 사냥에 실패한 늙고 허기지고 상처 입은 사자는 하이에나나 늑대 무리의 먹잇감이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자리에서 곧 숨을 거두어 바로 대머리 독수리들의 잔치가 벌어졌을지도 모르겠다.
무리의 우두머리 자리를 뺏기 위해 도전하다가, 물소나 코뿔소 뿔에 받히거나 또는 우두머리 자리를 지키기 위한 혈투에서 상처 입은 맹수들은 동굴을 찾아 들어간다고 들었다. 은신처로 기어 들어가 자신의 상처를 혀로 한없이 핥는단다. 기운을 차리고 다시 동굴 밖으로 나올 가능성보다는 아무도 없는 습한 동굴에서 생을 마감할 가능성이 훨씬 크다.
곧 젊은 사자에게 자리를 뺏길 불안에 휩싸인 늙은 수사자는 이미 은신처로 이용할 근처 동굴을 찾아 놓았는지 모르겠다. 결국 시간이 흘러 늙고 병들 것을 안다면 말이다. 예전 같지 않은 체력과 사냥실력으론 더 이상 아프리카 사바나에서 무리를 이끌며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수사자들은 알고 있을까?
동굴 같은 은신처를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전원주택은 조용하다 못해 괴괴한 곳에 많이 있다. 한창 일할 때는 도심과 떨어진 전원주택에 살 여건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이가 들거나 은퇴하면 전망 좋은 곳에 많은 사람들이 집을 짓는다.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만나는 사람은 그나마 더 적어진다. 혹시 동굴 같은 은신처로 전원주택을 찾아 들어가는 것은 아닐까?
혼자 자주 여행하는 나 같은 사람들은 그 여행 자체가 동굴 같은 은신처가 아닐까 싶다. 아는 사람 전혀 없는 외국을 혼자 다니다 보면 그곳에서는 영락없는 이방인이다. 이방인으로 머물고 있는 숙소가 바로 동굴이다. 아무도 말 걸지 않기에 자연스럽게 묵언수행을 한다.
늙고 병든 사자처럼 상처를 핥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