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도 얼굴이 있다면
잠시 후 열차가 순천역에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H는 내 옆에서 잠들어 있다. 이제 내려야 한다고 말하며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자, 그는 금세 잠에서 깬다. 피곤함이 가셨는지 기지개를 쭉 켜며 벌써 도착했냐고 되묻는다.
우리는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번갈아 가며 졸았다. 4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우리가 기차를 탄 이유는 나의 친할머니를 만나러 가기 위해서였다. 곧 있을 나의 결혼 소식을 알리러 가는 길이었다. 지금은 남자친구지만 곧 남편이 될 H를 소개하러 가는 길.
순천역에서 버스를 타고 1시간쯤 가면 벌교읍에 도착한다. 읍에서 또다시 버스를 타고 면으로 들어가야 할머니 집이 나온다. 다행히도 먼저 내려와 있던 엄마, 아빠가 벌교로 데리러 와주었다.
벌교 읍내의 풍경을 차창으로 바라보다가, 지난번 여행이 떠올랐다. 4년 전, 삶이 휘청거릴 때 나는 이곳을 찾았다. 온몸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공허했다. 내가 누군지 몰라 자주 바닥을 더듬거렸다. 그러다 나를 찾아보겠다며 무작정 할머니집에 갔었다. 할머니는 내 어린 시절을 지켜봐준 사람 중 하나였으니까. 그때의 나는 혼자였지만, 지금은 가족들과 함께다.
H를 본 할머니는 그의 인상이 선하다며, 흡족해하셨다. H와 나의 웃는 얼굴이 참 닮았다며 환히 웃으시기도 했다. 할머니의 연세는 올해 아흔 둘이다. 귀가 거의 들리지 않으셔서 의사소통이 어려웠다. 우리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때면, 할머니는 그저 멋쩍게 웃었다.
소화 기관이 종종 멈추기도 해서, 할머니는 밥을 제대로 들기 힘들다. 그래서 왜소하고 바싹 마른 몸, 그 몸으로 나와 H를 위한 밥상을 마련해주셨다. 평소라면 올라오지 않았을 생선 반찬도 잔뜩 있다. H는 고봉밥에 반찬을 올려가며 맛있게 밥을 먹었다. 할머니는 뿌듯한 미소를 연신 지었다.
나는 왠지 잊어버리면 안될 것 같아 할머니의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그러다 문득 할머니의 웃는 얼굴이 나와 닮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아버지를 닮았고, 아버지는 또 할머니를 닮았다. 우리 가족의 얼굴은 이렇게 겹겹이 닮아 있다.
사랑에도 얼굴이 있다면, 그것은 매일 내 옆에서 잠드는 H의 얼굴과 닮았음을 안다. 우리의 얼굴은 또 우리의 아이와 닮을 것이고, 그 얼굴은 항상 사랑을 닮았을 것이다. 나는 언젠가 나의 얼굴을 닮은 사람을 반갑게 맞이하며, 그의 밥숟갈 위에 반찬을 올려줄지도 모른다.
오랜 기간 찾아다녔던 나의 얼굴을 선명히 그리는 방법을 새로이 알아간다. 그렇게 차곡히 쌓여가는 미래를 믿으며, 오늘을 살아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