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 싫은 사람, 피해야 하는 사람 - 책과사람(정재원&나태주님)
유튜브 〈책과 삶〉에서 정재원 아나운서와 나태주 시인이 대화편을 보고, 그 내용에 대한 제 생각을 덧붙여 정리한 글입니다.
아무래도 싫은 사람 -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
아무래도 좋은 사람 - 항상 생각나고 그리운 사람
당신은 그리운 사람이 있나요?
당신은 누군가에게 그리운 사람인가요?
타인을 이용해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을 충족하는 데 능숙한 사람들이 있다. 마치 자동결제 버튼처럼 나를 눌러 원하는 메뉴를 교묘하게 꺼내 먹는 사람들. 이들은 살기 위해 먹는 게 아니라, 먹기 위해 산다. 하루 종일 음식 생각뿐이고, 그 먹기 위한 욕망에 주변 사람을 끌어들이는 데 놀라울 만큼의 스토리텔링 능력을 발휘한다.
“후배가 고생했으니 밥 한 그릇 사줘야지!”
“속상할 것 같은데 밥이나 같이 하자!”
말만 들으면 따뜻한 배려 같지만, 자기가 먹고 싶은 메뉴를 누군가의 지갑으로 해결하려는 의도가 교묘하게 숨겨져 있다. 식사 자리에서 그들은 정작 관계의 의미도, 대화의 깊이도, 마음의 교류도 없다. 오직 먹는 행위 자체가 중심이고, 어떤 메뉴를 선택할지에 눈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상대는 사람이 아니라 결제 수단일 뿐이다. 자신이 먹기 위해 타인의 시간과 비용을 자연스럽게 게다가 아주 능숙하게 끌어온다.
나태주 시인조차 “이런 사람이 제일 싫다”라고 하셨다. 나태주 님 같은 분도 싫은 사람이라면,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은 더 말해 무엇하랴.
식탐만을 전부로 알던 사람들이 영역을 넓히면, 그 방향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바로 권력추구형과 재산추구형이다.
먼저 권력추구형. 이들은 온화한 말 뒤에 칼을 숨기는 사람들이다. 겉으로는 부드럽고 번지르르한 말투로 “고생 많아요”, “정말 최고입니다” 같은 칭찬을 남발한다. 분위기를 띄우는 재주도 좋고, 미소도 매끈해서 그 순간만 보면 참 좋은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돌아서는 순간, 그 온화함은 곧바로 날 선 칼날로 변한다. “이렇게 살살 달래가면서 해야지.” “지들이 버티면 어쩔 건데.” 겉으로는 ‘온화한 리더’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타인의 피땀 어린 희생 위에 자기 성과를 덮어 씌우는 사람이다.
앞에서는 겸손한 척하고 뒤에서는 공을 슬쩍 가져가며, 남의 성취를 희석시키는 데 탁월하다. 이런 유형은 조직의 상층부에 많다. 말을 번지르르하게 포장하는 능력, 타인의 성취를 자신 중심으로 재해석하는 기술, 조직이 좋아할 만한 외형과 태도만 정확히 챙기는 감각. 이 모든 것이 그들을 유능해 보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온화함은 마음의 따뜻함이 아니라 권력 유지 기술이며, 번지르르한 태도는 선의가 아니라 자기 이익을 감추는 포장지다.
그들 곁에 오래 머물면 마음은 축나고, 자존감은 바닥나고, 운은 서서히 마른다. 물론 따뜻하고 유능한 리더도 많다. 그러나 이런 야비한 리더 역시 곳곳에 스며 있다. 말보다 행동을, 행동보다 일관성을 보라. 번지르르한 말 뒤에 숨은 칼을 알아보는 순간, 비로소 나를 지킬 수 있다.
다음은 재산 추구형이다. 이들은 관계를 오직 ‘돈이 되는가’로만 계산한다. 돈은 살기 위해 필요하지만, 돈만을 위해 사는 사람들은 돈의 기준으로 사람을 재단한다.
이 관계가 돈이 될까. 돈이 아니라도 내가 이용할 수 있는 인기·지위·미모가 있을까. 그들의 머릿속에는 늘 이 계산식이 돌아간다. 그들에게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수익 모델이다. 돈을 벌기 위한 관계, 돈을 절약하기 위한 관계, 돈을 더 뜯어내기 위한 관계… 그 바깥에는 감정도, 배려도, 진심도 없다. 작은 도움을 줄 때도 반드시 원금 + 이자를 받아내려 한다. 내가 어려워지면 멀찍이 떨어지고, 잘 될 조짐이 보이면 미끄러지듯 다가온다. 관계에 이득이 없다고 판단하는 순간, 연락은 말끔히 끊긴다.
이런 사람들과 오래 섞여 있으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마르고, 관계에 대한 신뢰는 망가지고, 내 운의 흐름까지 탁해진다. 사람을 이용해 돈을 키우는 사람 말고, 돈이 있어도 사람을 먼저 보는 사람을 곁에 두어라. 그게 내 운을 지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매력적이다. 겉을 포장하는 능력이 탁월하기 때문이다. 말투를 부드럽게 만들고, 표정을 공손하게 꾸미고, 분위기를 적당히 연출하면 겉은 금세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눈빛은 꾸미지 못한다. 눈빛에는 그 사람의 결이, 마음의 투명도, 욕망의 방향이 고스란히 비친다. 따뜻한 사람의 눈은 빛이 정면으로 들어와 은은하게 반사되는 느낌, 투명한 물이 고요히 고여 있는 듯한 느낌이다. 너무 맑은 목소리를 들으면 문득 눈물이 차오르듯, 그런 맑은 눈과 마주치면 마음이 녹고, 나도 모르게 내 삶이 반성되기도 한다.
반면 피해야 할 사람들의 눈은 다르다. 눈동자는 웃는데 진심이 없다. 웃음이 남기지 않는 깊이, 웃다가 뚝 끊기는 이상한 단절. 눈빛에 음영이 져 있고, 어딘가 날카롭고, 잔머리가 돌아가는 속도가 스치듯 비친다. 그 기운은 말보다 먼저 다가온다. 몸이 미세하게 경직되고, 내 마음 안쪽에 얇은 경계가 그어진다. 그리고 만남이 끝난 뒤 감정은 더 확실해진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가볍고 밝은 여운이 남지만 이런 사람을 만나면 찜찜함이 먼저 남는다. 무언가를 털린 것 같은 기분, 설명할 수 없는 무게, 말로 잡히지 않지만 감각으로만 알아지는 그 이질감. 그게 바로 내 마음이 이미 알고 있는 신호다.
논리가 인지하기 전에 직관이 먼저 경고한다. 사람을 구별하는 최고의 감각은 경험도 지식도 아니다. 바로 눈빛과 기운이다. 이 두 가지는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보기만큼 보이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만큼 보이는 것이다.
내면이 텅 비어 있으면 아무리 돈이 많아도 불안하다. 알맹이 없이 운으로만 돈을 벌었기 때문에 그 돈은 언제든 증발할 수 있다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맛있는 걸 먹어도 허기가 가시지 않는다. 사랑에 허기진 아이들이 식탐이 많아지는 것처럼, 받지 못한 마음을 다른 것으로 채우려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결핍된 사람들이다.
사실 결핍은 성장의 선물이고, 성찰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핍을 잘못된 방식으로 메우려 한다.
남을 속이고, 남을 이용하고, 남을 밟아서라도 자기 잇속을 채우려 한다. 하지만 외부로 채운 것은 잠시 달콤할 뿐, 금방 증발한다. 그래서 불안은 다시 고개를 들고 욕망은 더 크게 달려든다.
부족한 자신을 인정해야 한다. 도망치지 않고 핑계 대지 않고, 내 결핍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 그리고 그 결핍을 하나씩 천천히 스스로 채워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자신을 용서하는 순간 비어 있던 자리가 조금씩 채워진다. 그때 비로소 마음이 자라는 것이다. 내면이 채워지면 돈이 많지 않아도 안정이 생기고 가난해도 허기가 덜하고 적게 먹어도 마음은 편안하다. 결핍을 외부에서 구걸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내면이 채워져야 인생이 채워진다.
결핍을 단단히 채우는 과정이 없으면 불안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아무리 벌어도 부족하고 아무리 먹어도 배고픈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허기는 결국 마음의 허기다. 채워야 할 것은 밖이 아니라 내면이다.
https://youtube.com/watch?v=2in-AZ-FpLI&si=2h3TGjBLh8o9byH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