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화문으로 한번 와. 사무실은 5층이야. 1층 핫초코가 기가 막히다고.
한번 가면 되는 것일까. 미화는 주성의 문자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을 주겠다는 건지, 그냥 오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애매함은 만나서 푸는 게 맞는 걸까. 아마, 그게 프리랜서, 진정 일을 얻으려는 을의 자세겠지.
그는 마치 내 애인처럼 말했다.
미화가 디자이너로 일했던 출판사에서 그는 마케팅 부서의 과장이었다. 3년차 대리로 입사했던 그에 비해 그는 이미 입사 10년차로 마케팅 부서 팀장이었다. 영업 나갈 때면 붕어빵이나 호두과자 같은 간식을 자주 사들고 왔던 그는 호기롭게 오늘의 성과를 이야기하며 손수 간식을 나눠주었다. 담배 냄새 풍기는 손으로 쥐어주는 간식은 습기를 먹어 눅눅하거나 너무 달았다. 5년간 그와 공유한 기억은 그것이 전부였다. 그만두는 그 순간까지 그는 그녀에게 별 존재감이 없었다.
목표는 창업이었다. 충분히 준비했다고 생각했지만, 동업하기로 했던 친구와 충돌하며 난관을 맞았다. 쇼핑몰 상품페이지 디자인 분야에서 자리잡은 친구는 계획된 그녀의 합류를 부담스러워했다. 기존 거래처가 중요한 만큼 홀로 창업을 시도하는 일은 리스크가 따랐다.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모아둔 돈을 까먹는 하루하루가 계속되었다. 그때 주성의 전화를 받았다.
“바로 일하지 않을 줄 알았어. 미화 대리는 인생을 꽤나 즐기는 사람이잖아.”
변하지 않은 건 그였다. 아무말이나, 호기롭게, 되는대로... 그녀가 아는 그는 그저 상황이 가리키는 대로 말을 하는 사람이었다. 진실, 사실 이런 건 필요 없었다. 나름대로 실적을 유지하던 영업의 비밀이 그것이었을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순간을 모면하기 위한 것들이 쌓여 데이터를 쌓고 방향성을 갖추면 실력이 된다. 그녀는 오랜만에 온 스타벅스에서 남이 사준 그랑데 사이즈의 두유 라떼를 마음껏 음미했다. 한참 동안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던 그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표정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사업 시작하신다면서요? 들었어요.”
그의 표정이 개운해졌다. 잠시 입을 다물고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엷은 미소를 지었다. 역시 그랬다.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작은 사업을 시작했다. 품목은 ‘박스’였다. 기업체, 특히 공기관들은 서류보관을 위한 정해진 양식의 박스를 갖고 있다. 기관 납품에 유리한 것들, 예를 들어 사회적기업으로서 청년창업, 새터민 채용, 여성 대표 등 모든 카테고리를 동원했다.
“디자인 작업이 필요하거든. 박스도 그렇고 카탈로그, 명함. 근데 알잖아. 이제 시작이라 돈이 없어서 살짝, 크게 공들이지 말고 그냥 프로그램 좀 돌려주면 안 될까? 간단하게 말이야.”
새삼 놀라거나 짜증날 것도 없다고 미화는 생각했다. 디자인 작업을 구글 검색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많았다. 그의 머릿속에 아마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생각따위는 없을 것이었다. 미화는 갑자기 맛이 없어진 라떼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던 주성은 갑자기 비장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제 곧 자리 잡을거고 이런 인연으로 미화 씨도 앞으로 거래처와 일을 키워가는거지. 같이 시작하자!”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그 불안한 마음도 알 것 같아, 미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만이다! 손까지 덥썩 잡으며 좋아하는 주성의 모습을 보며 불길한 마음이 들었지만 남은 라떼를 털어넣으며 떨치려고 애썼다. 제품과 회사로고 등 작업은 시간과 공이 꽤 많이 들어갔다. 그녀의 작업은 마포의 한 숯불돼지갈비 연기와 함께 홀연히 사라졌다.
다정한 그는, 마치 내 연인 같다.
5호선 광화문 출구를 나가면 만나는 목욕제품 샵. 낡은 빌딩이지만 딱 봐도 좋은 위치다. 그의 사업은 잘되었다. 경기도 외곽의 창업센터에서 시작한 그는 일 년만에 광화문으로 이사했다. 소소한 일들을 부탁하던 전화가 광화문으로 가며 뚝 끊어졌다.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외주일을 이어가던 미화는 포털사이트를 보다가 익숙한 회사 로고를 발견했다. 이년만에 창업 분야의 성공사례로 꼽힐만큼 사업은 궤도에 올라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만든 회사로고가 촌스러웠다. 수정이라도 제안할겸 전화해 볼까 망설였다. 구차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영업이란 언제나 어려웠다. 그 어려운 것을 10년 넘게 해낸 주성이 다시금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이렇게 성공하는 거다! 근데 성공한 건 맞나?
- 당연히 만나야지. 안 그래도 궁금하고 보고 싶었는데.
사무실을 찾는 일은 쉬웠다. 지하철역 바로 앞에 지어진 건물은 오래된 작은 건물이었다. 작고 낡은 엘리베이터는 11층에 선 채 내려오지 않았다. 반들대는 계단 모서리가 형광등 불빛을 괴괴하게 반사했다. 주머니에 손을 빼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층을 오르기 위해 두 번 꺾인 모서리를 돌며 숨을 골랐다. 좁은 폭과 미끄러운 모서리는 헛발질하기 딱 좋았다. 구두를 꿰어신은 발 끝에 힘을 주었다. 미끄러져 다치면 곤란했다.
5층 입구, 보안이 걸린 입구에서 인터폰을 들어 그의 이름을 댔다. 종이박스 제작회사에 어떤 보안이 필요한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보안이 풀린 사무실 풍경이 물류센터처럼 정신이 없어서, 이것을 숨기기 위해서였나 막연히 짐작할 뿐이었다.
“왔어? 정신이 없어 사무실이 이렇다. 이해바래.”
활짝 웃는 그를 보며 뭘 이해해야 하는지 생각해보았다. 사회적기업, 친환경기업, 여성기업인증서, 창업 대상, 최우수상... 체리색 액자에 든 인증서와 묵직한 플라스틱덩어리 상패들이 대표실 입구에서 비현실적으로 번뜩였다. 회의 테이블위엔 다양한 리플렛들이 놓여 있었다. 두툼한 모조지로 새로 제작한 것들이었다.
“미화씨 성에 안차지? 돈 들여 맡기면 제대로 해야 하는데 결과물들이 그렇다니까. 미화씨같은 디자이너가 없어, 정말이야!”
허리를 구부린 그가 양쪽 팔을 뻗어 미화의 어깨를 슬쩍 감싸 스치며 리플렛에 손을 뻗었다. 페이지를 넘기는 그녀의 손가락이 순간적으로 그와 엉켰다. 자리에 얼어붙은 그녀는 그와의 접촉면을 최소로 하기 위해 바짝 웅크리며 리플렛을 덮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창밖을 보다가 생각난 듯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
“맞다, 내가 약속했지? 핫초코 사준다고.”
그는 헤어진 애인처럼 냉정하다
1층에 고급스런 초콜렛샵에서 주성은 아이스초코와 커피를 사들고 앞장서서 나갔다. 담배갑을 쥐고 그가 간 곳은 옥상 흡연실이었다. 담배를 피우던 이들이 아무렇게나 밟아끈 꽁초들로 방수도료를 칠한 초록색 바닥은 얼룩지고 더러웠다. 3월의 꽃샘추위로 한기가 가득한 허공에서 미화는 그가 사주겠다던 ‘핫초코’가 아닌 ‘아이스초코’를 두 손으로 번갈아 가며 들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얼굴엔 계속 머리카락이 들러붙었다. 아무렇게나 흩날리는 그의 담배연기와 함게 아무렇게나 얼굴에 엉겨붙었다. 차가운 초코음료가 칼로리로 승화되길 바라며 빨대를 입에 물었다. 몸은 더욱 추워졌다. 모든 것이 엉망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냥 말을 해버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녀가 한 말이라고는 고작...
“리플렛 제작하려면 말씀을 하시지 그랬어요.”
허허롭게 웃은 그는 커피를 한모금 먹은 후에 다시 담배를 꺼내들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럴걸. 내가 미화씨 실력을 아는데 말이야. 돈 값 못하는 사람들한테 맡겨 놨더니 저렇네.”
사업의 어려움에 대해 늘어놓는 그 앞에서 그녀는 아이스커피를 홀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카락을 귀옆으로 넘겨 꼽다가 바람의 방향으로 몸을 틀었을 때였다. 구름 낀 하늘에 낮게 뜬 헬기가 요란한 소리를 냈다. 청와대발 헬기라고 그가 말했다. 바닥이 아득하게 보이는 11층 옥상, 헬기에서 내려다 보면 이곳도 그저 바닥이겠지.
촌스러운 초록색의 커다란 탱크가 볼품없이 붙은, 헬기가 설 자리도 없는 바닥중의 바닥. 두두두, 헬기소리가 점점 작아지는 것을 들으며 미화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옥상 문을 열었다. 담배를 끄지 않은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옥상 입구 재떨이겸 쓰레기통에 음료수를 놓고 주먹을 쥐었다. 계단에서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서는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안된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모서리가 닳은 계단을 하나씩, 내려오기 시작했다.
깊고 깊은 지하철에서 궁리했다. 애인이 아닌 나에 대해
칠천원짜리 고급스런 아이스초코엔 우유가 든게 틀림없었다. 유제품을 귀신같이 판별해내는 자신의 위장이 반응하고 있었다. 소리를 내기 시작한 배를 부여잡고 탁한 바람을 맞으며 지하철을 탔다. 친구에게 일 관련 문자가 와 있었다. 자신의 일중 일부를 재하청하며 메일을 보냈다고 했다. 미화는 문득 조카의 전쟁놀이 레고 조립을 떠올렸다. 줄지어선 병정들 사이, 저 끝 어딘가에 서 있는 작은 레고 인간들. 먹고사는 일은 이런 일들을 애인으로 여기며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존이랑 이토록 차갑고 냉정한 것이리라.
“아우, 새댁 여기앉아요. 핑크좌석엔 죄다 남자들이 앉아있네.”
앞에 앉은 노부인이 일어나 그녀의 팔을 끌어당겼다. 배에 손을 가져간 것을 보고 임산부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저 배가 나와서 일지도. 무슨 말을 덧붙이기도 애매해서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노부인은 그녀를 보며 한번 미소를 짓고 문가로 나가 섰다. 진실이든 착각이든 나름의 궁리에서 나온 배려가 눈물겨웠다. 옥상과 지하는 무엇이 다른 걸까. 비행기와 옥상은, 또 그보다 높은 곳은 어떻게 다른 건지.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가 내리는 노부인의 뒷모습을 보며 미화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녀가 데우고 일어난 자리가 따뜻하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