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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시딘 Nov 08. 2020

1978년의 피터캣

 

버터 나이프로 두텁게 덧칠한 어둠이 깔린 밤이었다. 유니폼을 갈아입고 걸친 니트와 모직 코트 위로 어둠의 무게까지 더해져 허리가 휠 정도였다. 척추뼈를 만지는 느낌으로 허리를 편 순간, 검은 실루엣의 고양이 한 마리가 눈앞에 들어왔다. 더 정확히는 어둠의 농도를 흐리는 레몬빛 조명의 작은 간판이었다. 검은 고양이는 역시 심플한 검은 글자, ‘Peter Cat.’의 r과 C 사이에 몸을 늘이고 있었다. 불빛이 따뜻해 보여 간판이 가리키는 지하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회색에 타르가 덧칠된 두터운 철문을 미는 순간 음식냄새 섞인 따뜻한 공기가 섹소폰 소리에 실려 달려들었다. 이곳은 바깥과, 그리고 내가 있던 은행과 완전히 다른 공간이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레코드 판이 두 벽면을 가득 채우고 한쪽 벽엔 주크박스와 핑볼 게임기가 경박한 네온들을 빙글거렸다. 


“어서 오십시오.”

바 건너편의 주인이 짙은 눈썹을 살짝 올리며 미소 지었다. 이끌리듯 그의 앞에 앉았다. 손님은 거의 없었다. 화요일 밤 열시는 술을 마시며 재즈를 듣기엔 주말에서 너무 멀다. 바의 마호가니 나무는 땅콩부스러기 하나 낀 곳 없이 아주 깔끔하게 닦여 있었다. 왠지 안심이 되는 마음으로 나는 가방에 든 노트와 펜을 꺼냈다. 그 옆으로 조심히 투명한 물 잔을 놓는 주인의 손이 보였다. 잔과 그 안에 든 물은 너무 맑고 깨끗해서 건네는 주인의 손까지 투명하게 만들 것 같았다. 가계와 하나로 보이는 주인은 짙은 눈썹 때문인지 뚱한 인상이었지만 옅은 미소가 감돌았다. 느낌 좋은 회색 셰틀랜드 울 스웨터에 어두운 베이지 빛 면바지를 깔끔하게 입고 진 원단으로 만든 앞치마를 둘렀다. 


“배가 고파요. 뭐든 좋으니 식사가 될 만한 메뉴 없을까요?”

건네받은 메뉴판을 돌려 주는 순간 그의 눈빛이 내 손을 빠르게 스쳐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나의 손가락은 아홉 개다. 얼른 주먹진 손을 테이블 아래로 내리고 고개를 돌렸다. 덤덤한 표정의 주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주방으로 향했다. 


노트를 펴고 오늘 분의 글을 써 나가기 시작했다. 시덥잖은 그저 나만의 의식이자 취미다. 소설 같은걸 써보고 싶었다. 은행에서 일어나는 일들, 금고를 건너가면 펼쳐지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 문학을 애호하는 동료는 ‘가와바티 야스나리’나 ‘나츠메 소세키’, 아니면 그가 요즘 빠져있는 ‘에도가와 란포’를 권했다. 서가에 잠식한 책들이 아닌, 나는 지금 우리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절대 알 수 없지만.

남자 하나가 주크박스에 동전을 넣는다. 비치 보이스의 ‘캘리포니아 걸’이 흘러나온다. 연녹색의 니트 가디건을 걸친 남자는 짙은 진을 걸친 다리를 흔들며 박자를 맞춘다. 글을 쓰긴 틀렸군. 나는 볼펜 깍지를 쥐고 주변을 둘러 보았다. 바의 한쪽 끝에는 감색 프록코트를 의자에 걸쳐둔 짧은 머리의 남자가 다시 담뱃불을 붙이고 있다. 홀 저편에선 비즈니스 맨으로 보이는 둥근 배를 가진 남자가 붉어진 얼굴로 앞에 앉은 뾰족 턱 남자의 이야기를 졸며 듣고 있다. 그들을 돌아보던 사이, 내 앞에 토마토 소스 스파게티가 놓였다. 

“차조기를 얹었습니다.”


남자는 풍선에 프레온 가스를 넣듯 신중한 몸짓으로 맥주병을 땄다. 스파게티는 맛있었다. 나와 노트를 번갈아 보던 그는 한걸음 떨어져 서서 내 노트에 적힌 문장들을 훑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얼른 노트를 덮었다.  

“죄송합니다. 훔쳐본 건 아니에요.”

“부끄러워서요. 절망스럽죠, 문장들이.”

그의 짧고 짙은 눈썹이 한껏 올라갔다. 

“완벽한 문장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완벽한 절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는 내가 대꾸하기 전에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데릭 하트필드’라는 소설가가 있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작가죠. 문장은 읽기 까다롭고 스토리는 엉성하고 테마는 치졸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문장을 무기로 싸울 수 있는 많지 않은 비범한 작가 중 한명이었죠.”


데릭 하트필드. 모르는 작가다. 하긴, 모든 곰팡이의 이름을 알 수 없는 것처럼 세상 작가들의 이름을 다 알 수는 없는 일이다. 그는 카운터 아래 놓인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문장을 쓰는 작업은, 한마디로 말하면 자신과 자신을 둘러 싼 사물과의 거리를 확인하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필요한 것은 감성이 아니라 잣대이고요.”

그는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볶은 땅콩이 놓인 그릇을 앞에 내밀었다. 나는 오른손으로 땅콩을 문질러 왼손에 껍질을 옮겼다. 그는 다시 내 손을 바라보며 담배를 깊이 빨아들였다. 나는 두 손을 테이블에 올리고 꼼꼼히 땅콩과 껍질을 분리하며 입을 열었다. 

“손가락은 아홉 개 뿐이지만 은행 업무를 잘 해내고 있답니다. 지폐 50장을 빠르게 셀 수도 있어요. 어렸을 때 자전거 체인에 손이 감겼어요. 오래된 사고라 아무렇지 않아요.”

그가 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손가락이 하나 많은 것보단 현실적으로 보입니다. 서사도 있고요. 대신 손님은 아름답고 모양새 좋은 유방을 가졌군요. 핏되는 니트가 아주 잘 어울립니다. 이것이 리얼리티죠.”

진지한 그의 말에 실소가 터졌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서사가 있는 리얼리티라니, 제법 진지한데요? 이건 마치 주크박스 앞의 남자가 쌍둥이 자매와 함께 산다는 이야기 같잖아요.”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그는 은밀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어떻게 아셨나요? 저 손님은 길에서 우연히 만난 쌍둥이 자매와 함께 살고 있답니다. 구별할 수 없이 똑같이 생겼다고 해요. 그녀들을 위해 늘 커피, 버터크림, 메이플 쿠키를 사죠. 세 사람이 분지 너머 골프장에서 커피와 쿠키를 똑같이 나눠 먹으며 석양을 바라보곤 하죠. 그녀들은 3만 광년 정도 떨어진 곳에서 그의 앞에 마치 유성이 떨어지듯 나타났다고 해요.”


나는 작게 소리 내 웃으며 맥주를 마셨다. 바 구석에 앉은 남자가 짐빔을 주문했다. 술병을 내리기 위해 날개를 펼치듯 선반으로 손을 올린 주인을 무심히 보다가 그의 니트 겨드랑이가 터진 것을 발견했다. 받쳐 입은 흰 티셔츠가 비치는 것을 보며 나도 그를 불렀다. 

“니트 벗어주셔야 겠는데요. 겨드랑이가 터졌어요.”

의외로 그는 순순히 니트를 벗어 건넸다. 나는 모서리가 너덜해진 휴대용 반짓고리를 꺼내 회색 실을 꿰었다. 붉은 리바이스 마크가 찍힌 반소매 면티 차림의 그는 아홉 개의 손가락이 능숙하게 바느질하는 것을 고요히 지켜보았다. 그 시선이 나쁘지 않았다. 

“답례로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들려드릴까요?”

진지한 미소를 짓는 그를 보며 나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 왼편에 늘 오시는 손님은 ‘쥐’라고 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전쟁 중에 고약을 팔았고 그 후엔 화장실용 세제를 팔아서 부를 일궜죠. 부잣집 아들인 그의 주차장에는 벤츠와 트라이엄프TRⅢ 가 나란히 서 있어요. 대학은 다니다 그만 두었다고 합니다. 세상을 바꾸고 싶었지만, 뭐 그렇듯 내가 바뀌는 게 더 쉽다는 걸 깨달았으니까요. 현실은 둘 다 어렵지만.”


주인은 담배 한 개피를 꺼내들고 내게도 권했다. 간판과 똑같은 고양이가 그려진 성냥을 그어 불을 붙였다. 허공에 두 개의 오렌지 빛 총알이 빛났다. ‘쥐’라고 불린 손님은 읽던 책의 모서리를 접으며 페이지를 막 넘기는 중이었다. <나사의 회전>, 헨리 제임스의 소설이었다. 

주인의 말에 의하면 쥐는 소설을 쓴다. 섹스와 죽음이 나오지 않는, 일테면 ‘그냥 놔두어도 사람은 죽고, 여자와 잔다는 그런 얘기’를 쓰고 있다고 했다. 항구도시에 살던 그는 여자와 세상에 대한 극한의 상실을 느낀 후 스물다섯 되던 해에 도쿄로 왔다. 


“돌아갈 수 있는 다리를 스스로 불태워 버렸어요, 쥐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주인은 주방으로 사라졌다. 가계엔 금새 달콤한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는 갓 구운 팬케이크 접시를 쥐와 내 앞에 밀어놓았다. 버터밀크를 듬뿍 넣고 메이플 시럽을 적신 케이크는 따뜻하고 폭신했다. 주인은 ‘쥐’라고 불린 손님앞에 콜라병을 함께 두었다. 퉁, 소리를 내며 포크로 콜라병을 튕긴 쥐는 팬케이크 위에 콜라 한 병을 모두 부었다. 재떨이에 담배를 걸쳐 두고 그는 콜라의 탄산 터지는 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한 팬케이크를  포크로 무너뜨리며 먹기 시작했다. 

“먹고 마시는 걸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다고, 저렇게 즐기신답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케잌 모서리에 버터를 으깨 입에 넣었다. 나른해진 버터가 혀 끝에서 녹았다. 주크박스의 음악이 꺼지고 조용한 가계엔 경쾌한 기계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핀볼 게임의 스타트 소리였다. 연녹색의 니트 가디건을 걸친 남자가 게임기 앞에 바짝 붙어 있었다. 튕튕, 금속공이 구르는 소리와 함께 경쾌한 전자음이 재즈바를 채웠다. 남자의 구부정한 등은 담배연기 너머로 비현실적으로 흘러가 버릴 듯 보였다. 주인은 새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맥주를 따랐다. 빠른 템포의 전자음이 터지듯 흘러나왔다. 

“보너스 라이트!”

주인은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곤 맥주를 마셨다. 


“모든 것이 끝났죠. 그러나 그에겐 끝이 아니었습니다.”

남자는 사랑하던 여자를 잃었다고 했다. 그녀가 떠난 후 남자는 동네 오락실에 있던 낡은 핀볼기계에 빠져들었다. 아르바이트 수입 대부분을 쏟아 부으며. 쓰리 플리퍼 스페이스십. 

그만이 그녀를 이해했고, 그녀만이 그를 이해했다. 그는 쇠공을 밀어 올리며 그녀에 대한 기억을 자신이 상실한 것들을 조악하게 그려진 기계속 우주에 날리려고 애썼다. 그럴수록 그의 기억은 자꾸 고여 흘러 내렸다. 쓰리 플리퍼 스페이스십

어느날 핀볼 기계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는 핀볼을 그만두었다고 했다. 적당한 때가 되면 누구나 다 핀볼을 그만둔다. 그저, 그것 뿐 이었다. 

“그래서요, 그녀를 정리하고 잊은 건가요?”

두 번째 담배에 불을 붙이며 주인을 재촉했다. 주인은 고개를 젓고 내 앞에 샌드위치 접시를 내 놓았다. 구운 식빵에 시들기 시작한 양상추와 소세지, 말라붙어 끝이 말려들어간 슬라이스 치즈가 든 볼품없는 샌드위치였다. 사흘 굶은 원숭이나 손을 뻗을 비주얼이었다. 그러나 샌드위치를 집어 들지 않으면 주인이 입을 열지 않을 것 같아 나는 얼른 두터운 부분을 힘껏 베어물었다. 의외로 상당히 맛있었다. 그제야 그는 입을 열었다. 

“우리의 마음에는 우물이 여러 개 파여 있어요. 그 우물 위를 새가 지나갑니다. 새는 상실의 기억을 다시 물어와 떨어뜨려 파문을 일으키죠.”



삼년이 지난 후 남자는 다시 핀볼을 떠올렸다. 눈을 감으면 범퍼가 볼을 튕기는 소리와 점수판에서 점수가 바뀌는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부도난 회사의, 큰 호응도 없던 마니아용 기계를, 그는 찾아냈다. 교외에 있는 양계 냉동 창고에 있던 한 핀볼 마니아의 50개 넘는 수집품 중에 그 기계가 있었다. 그는, 무덤같은 잿빛 냉동 창고 안에서, 전원이 들어온 기계 앞에 서서 그녀와 조우한다. 

‘너무 오래 있지 않는게 좋아. 당신이 견디기에는 너무 추운 곳이야.’

게임은 하지 않는다. 16만 5천점. 그녀가 떠난 삼 년전 그는 최고의 기록을 냈다. 그 기록을 깨고 싶지 않은 그는 그녀의 미소를 보며 담뱃불을 붙였다. 

‘많이 찾았어.’

‘왠지 이상해. 모든 게 실제로 일어난 일 같지가 않아. 괴로워?’

그녀는 빙긋 미소를 짓다가 잠시 허공에 눈길을 주었다. 그는 조명이 비쳐 얼룩덜룩한 그녀의 납빛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예쁘다고 생각했다.

‘아니. 무에서 생겨난 것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 것 뿐이니까.’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건 아주 오래전에 죽어버린 시간의 단편에 지나지 않았다. 얼마 안되는 그 따스한 추억은 낡은 빛처럼 그의 마음속을 지금도 여전히 방황하고 있다. 그리고 죽음이 그를 사로잡아서 다시금 무의 도가니에 던져 넣을 때까지의 짧은 한때를 그 빛과 함께 걸어갈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만나러 와 줘서 고마워.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잘 지내.’

그녀가 말했다.

‘고마워. 안녕, 잘있어.’ 그가 말했다.      



이야기를 마친 주인은 맥주캔을 소리나게 찌끄러뜨렸다. 나는 약간의 눈물을 흘린 것 같다. 기계 앞에 서 있던 남자는 다시 자리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주크박스에선 마빈 게이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시계는 한시 오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바에 떨어진 땅콩 껍질을 꼼꼼히 모으던 주인은 행주로 다시 한번 닦은 후에 무심히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확실한 건 없죠. 이 시간까지 남은 손님들도 가계도 나도, 또 당신도 불확실하다는 것만이 확실한 사실이랄까요. 우리가 확실히 지각할 수 있는 건 현재라는 한 순간에 지나지 않지만, 그것조차 우리의 몸을 그냥 스쳐 지나갈 뿐이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노트를 가방에 넣었다. 그는 내 왼손과 악수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단단한 에너지가 느껴지는 부드러운 손은 마치 폭신한 양털 커버로 감싼 오래된 만년필처럼 느껴졌다. 

“거짓말.”

작게 중얼거리는 내 목소리에 그가 웃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몹시 언짢은 일이죠. 거짓말과 침묵은 현대 인간 사회에 만연해 있는 두가지 거대한 죄라고 해도 맞는 말이에요. 실제로 우리는 곧잘 거짓말을 하고, 심심하면 입을 다물어 버립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일년내내 조잘거리고 그것도 진실밖에 말하지 않는다면, 진실의 가치 따위는 또 없어지고 말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는 팔을 들어 터졌다 붙은 쉐타의 겨드랑이를 만족스럽게 어루만졌다. 작은 입을 살짝 벌리며 아주 환하게 웃고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조심히 가세요. 천천히 걸어가세요, 그리고 물을 충분히 마시고요.”


우물처럼 깊고 검은 그의 눈을 바라보며 거리로 나왔다. 사람없는 새벽의 교차로에 서서 그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소설, 그의 이야기를 엮어보자고 생각했다. 가방 속에 든 노트가 날개를 달고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핀볼 기계의 불빛과 분절된 전자음, 무미하게 부딪히는 쇠공 소리. 쥐와 핀볼과 재즈, 쌍둥이자매, 우물, 스파게티, 샌드위치, 그리고..... 유방?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검은 새벽이 갑자기 흑요석처럼 빛나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무엇이든 쓸 수 있을 것 같은 환상 속에 핀볼 게임의 쇠공 구르는 소리가 빅스 바이더백의 피아노 연주처럼 경쾌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점멸하는 신호등을 보며 나는 집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

새해가 시작되고 한 달 후 나는 스미다구 지점으로 발령받았다. 아홉 개의 손가락으로 돈을 세고, 묶고, 커피를 타고 도장을 찍었다. 가끔 은행에 오는 회색 니트를 입은 손님을 보며 그를 떠올리기도 했지만 장부의 숫자 사이에서 그는 저편으로 밀려갔다. 백 속에 늘 넣고 다니던 나의 노트도 어디론가 ‘분실’ 되었고, ‘상실’의 시기를 지나 잊혀졌다. 계절에 따라 유니폼을 바꿔 입고 일상은 똑같이 흘러갔다. 그 후 이년간, 우물 주변을 그저 돌고 있을 뿐이었다. 우물 안으로 떨어지는 상실들을 못본 척 하며. 


이전에 있던 센다가야의 지점으로 사흘간 출장 파견을 가게 되었다. 그때의 그 모직코트를 입고 거리를 걷던 나는 어둑히 기울고 있는 로터리에 서서 재즈바 ‘Peter Cat’이 있던 붉은 벽돌 건물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간판은 보이지 않았다. 건물 앞에 서서 지하층을 바라보았다. 맥주와 안주를 파는 평범한 술집으로 바뀌어 있었다. 체념한 마음이 되어 건물 1층의 편의점에서 담배를 샀다. 낙타처럼 튀어나온 입을 가진 나른한 얼굴의 청년은 거스름돈과 영수증을 꼼꼼히 세어 건넸다. 돌아서던 나는 문득 생각난 듯 그를 바라보았다. 


“이 건물 지하에 재즈바는 다른 곳으로 옮겼나요? ‘피터 캣’ 이었던가...”

청년은 눈을 크게 뜨고 활짝 웃었다. 

“아, 가계 정리하시고 그분은 다른 일 하세요.”

“혹시 다른 가계를?”

은밀한 눈빛으로 청년은 빙글거렸다. 

“소설가랍니다. 두 번이나 연달아서 상을 받았다고 해요. 신기하죠?”     


서점에서 그의 책을 보았다. 웃음이 나왔다. 그래, 이런 글이 소설이라면 나도 쓸 수 있을텐데. 그러나 그는 썼고 나는 쓰지 않았다. 술기운에 눈물까지 흘린 이야기였지만 나에겐 ‘필연성’이 없었던 것이리라. 필연성을 가진 건 그였다. 이건 그의 이야기다. 그의 우물안에서 퍼올린, 유리컵을 쥔 손목까지 투명해지는 그런 시원한 이야기.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던 소설가 ‘데릭 하트필드’는 역시 그가 만든 인물이었다. 앰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자살한 30대의 소설가, 그 기묘한 작가는 그의 분신인 셈이었다.      


해피버스데이 그리고 화이트크리스마스     


나는 그때 내 노트에 써 있던 소설 제목을 떠올렸고 네 손가락 뿐인 왼손을 어루만졌다. 웃음이 나왔다. 해가 진 거리엔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하얗게 나오는 입김을 바라보며 그의 소설 마지막 문장을 떠올렸다.      


낮의 어둠이밤의 어둠의 깊이를 어찌 알 수 있으랴.            





*무라카미 하루키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을 추억하며 쓴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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