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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PLS 이혜령 Jul 02. 2020

차라리 다시 오지 않았다면…

2020 방글라데시 ⑦ 내가 없는 동안에

코로나와의 사투가 시작되기 전인 올해 1월, 일주일간의 짧은 일정으로 방글라데시에 다녀왔다. 5년 만에 방문이었다. 올해 다시 방글라데시에 방문할 일정을 계획하며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코로나로 인해 다시 기약 없는 약속이 되어버렸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는데, 방글라데시 여정을 정리하는 게 조심스러워 미루다 보니 어느덧 여름이 되어버렸다. 더 늦기 전에 정리를 해둬야 할 것 같아 사진도 다시 꺼내 보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메모를 모았다.



내가 없는 동안

1 안, 2 안, 3 안까지 두고 실렛에서의 위시 리스트를 만들어 두고 있었는데, 어제 하루를 공항에서 다 보내 버린 탓에 도저히 짬이 나지 않았다. 이번 멤버 그대로 셋이서 하반기에 다시 방글라데시에 올 계획을 나누고 있으면서도 온 김에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방글라데시는 나의 욕망을 쉽사리 용납하지 않았다.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오전 중으로 일을 마치고 방글라데시 엄마 집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그곳에서 가족들과 쉬다 공항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그나마 위안이 된 건 이웃이었던 아뿌(나이에 상관없이 여자를 부르는 호칭. '언니', '누나' 정도의 의미지만, 손위뿐 아니라 손아래, 동갑끼리도 사용할 수 있다)가 우리의 일정에 맞춰 우리가 있는 곳으로 움직여준다고 했다. '어디든 길은 있는 거야. 우리가 움직일게, 막내의 학교가 이동하는 그 길에 있어. 애들이 보고 싶어 해.’ 이동하는 길에서라도 잠시 얼굴을 보자고 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환호성을 지르며 서로 얼싸안았다. 아뿌는 그대로였지만, 아이들은 훌쩍 커버려 세월의 흔적을 새삼 느끼게 했다. 막 말을 시작해 나를 ‘안띠 바이'(이모 오빠?, '안띠'는 이모나 고모를 의미, '바이'는 '아뿌'처럼 연령에 상관없이 남자를 부르는 호칭이다)라고 부르던 똥꼬 발랄 막내딸은 수줍음 많은 초등학생으로 성장해있었다. 아이를 한번 안았다가 얼굴 한번 봤다가를 반복하며 어색한 대화를 이어갔다. 막내는 더 이상 나를 ‘안띠 바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첫째도 말 그대로 폭풍 성장한 모습이었다. 아이다운 모습은 전부 사라져 버리고 의젓한 고등학생이 되어 있었다. '만약 내가 여기 있었다면, 연애 상담도 해주고 쇼핑도 같이 다녔겠지?' 6년이라는 시간을 생각하면 당연한데, 한참 커버린 모습에 커가는 모습을 놓쳐버린 아쉬움과 서운함, 미안함 등 만감이 교차했다. 아뿌는 일에 늦겠다며 길을 재촉했다. 짧은 만남이 아쉽지만 헤어져야 했다. ‘고마워요. 보러 와줘서….’


차라리 다시 오지 않았다면

약속 시간에 늦을까 봐 급하게 헤어지고 왔는데, 직원은 오고 있다고 했다. 굳게 닫힌 철문과 수북이 쌓인 먼지, 오랜 시간 이용을 하지 않아 시간이 멈춰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뒤늦게 도착한 직원은 미리 와서 청소해야 했는데 미안하다며, 문을 열자마자 서둘러 우리가 앉아야 할 곳을 닦고 정리를 시작했다. 안절부절 서 있다가 책장을 정리하고 손을 보탰다. 한국어 교재와 2013년 한국어 말하기 대회의 포스터 등 한국어 수업의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었지만, 오래전, 그 시간에 멈춰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실렛 공립대학의 외국어교육센터. 10년 전 이곳에서 2년간 근무를 했다. 내가 귀국하고 한 차례 더 단원 파견이 돼 프로젝트를 이어 갔지만, 이후 현지 치안 문제로 파견 예정이었던 단원은 파견이 취소되었다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2017년 이후 교육부로부터의 모든 예산이 삭감되어 이곳에서 진행되던 모든 프로젝트가 중단됐다. 휴가 정도로 시골집에 내려가 있는 줄 알았던 직원도 현재 수업이 없어 시골로 내려가 있다가 우리가 온다는 얘기를 듣고 출근을 해준 거였다. 원래 기관장과 외국어 강사를 제외하고 4명의 상주 직원이 있었는데, 모두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어버렸다. 간간이 비정규적으로 수업이 개설될 때마다 출근하긴 하지만, 기관의 상태를 보니 그마저도 오랜 시간 열리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상황이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근무하던 직원들 모두 새로운 직장을 구하기엔 이미 나이가 들어버려 이직 또한 번번이 실패했다고 했다. 달리 다른 방법이 없던 직원들은 기관의 프로젝트 또한 완전히 중단된 것은 아니라며 곧 좋은 소식이 들리길 기다리며 희망 고문을 이어 가고 있었다. 내게 무슨 방법이 없겠냐며, 다시 올 수 없냐고 물었다. 종종 한국으로 전화를 걸어 내게 돌아와 달라고 말했던 직원이 그저 인사치레 한 말이 아님을 그때서야 알게 됐다.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무심할 수가 있을까. 죄책감이 올라왔지만, 이내 나를 변호했다. 사실 일찍 알았다고 한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방글라데시 정부가 한 일을 외국인인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냐 말이다. 그리고 이곳만의 문제도 아니었다. 교육부의 예산으로 운영하는 외국어교육센터가 전국 국공립대학에 10여 곳이 있고, 그들 역시 비슷한 문제를 앓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죄책감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사실 내가 근무를 하던 시절에도 직원들은 종종 임금을 제때 받지 못했다. 그래서 귀국 전 직원들과 몇 가지 대책을 마련했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우리의 방문에 얼마나 기대를 품고 왔을지를 생각하니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희망 고문을 더할 수 없었다.


2년 동안 열심히 활동했다고 자부했는데.... 추억은 아름다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동안 나의 노력이 모두 부정당한 듯한 자괴감과 함께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좌절감이 밀려왔다. 차라리 오지 않았다면, 몰랐다면 좋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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