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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PLS 이혜령 Aug 13. 2020

봉사로 만난 사이

2020 방글라데시 ⑧  만남 뒤 그리움은 더 단단해졌다

코로나와의 사투가 시작되기 전인 올해 1월, 일주일간의 짧은 일정으로 방글라데시에 다녀왔다. 5년 만에 방문이었다. 올해 다시 방글라데시에 방문할 일정을 계획하며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코로나로 인해 다시 기약 없는 약속이 되어버렸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는데, 방글라데시 여정을 정리하는 게 조심스러워 미루다 보니 어느덧 여름이 되어버렸다. 더 늦기 전에 정리를 해둬야 할 것 같아 사진도 다시 꺼내 보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메모를 모았다.

 



나의 역량을 한참 넘어선 일, 내가 처리할 수 없는 일은 세상에 너무도 많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막상 그런 현실을 마주하는 것은 참 고약했다.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은 너무도 무책임하지만, 그렇다고 희망 고문을 하는 건 더 잔인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매뉴얼이라도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직원과의 인터뷰를 마치고 나자 정적이 흘렀다. 짧은 침묵을 깨고 다음 약속이 있지 않냐며 자리를 정리하자고 한 건 직원이었다. 마치 도망치는 듯한 기분으로 기관을 벗어났다.


복잡한 마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거리로 나오자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서둘러 잡아탄 CNG(씨엔지, 오토바이를 개조한 미니 택시)는 자꾸만 도로 한가운데서 멈춰 섰다. 교차로에서도 몇 번이나 멈춰 서는 위험한 상황이 반복됐지만, 아슬하게 거의 스칠 듯 지나갈 뿐, 다른 차들은 우리를 잘만 피해 갔다. 그리고 그사이 사이를 또 다른 차들이, 수많은 사람이 메웠다가 사라졌다. 무법천지처럼 보이는 도로지만 그 속에서도 나름의 질서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난 그 질서가 보이지 않으니 적응될 듯하면서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도착한 곳은 홈스테이했던 방글라데시 가족의 집으로 원래 전날 방문하기로 했지만, 비행기 일정 때문에 오늘로 미뤄졌다. 하루를 그렇게 허무하게 날리고 일정을 정리하거나 조절해야 했지만, 어제부터 기다린 가족들을 생각하니 이 약속만은 취소할 수가 없었다. 정신없던 일정으로 계속해서 점심은 생략한 탓에 4일 만에 점심밥을 먹었다. 그것도 제대로 된 집밥이다. 한국에서도 종종 방글라데시에 있는 가족들에게 연락해 엄마 밥이 그립다고 찡얼거린 덕분에 우리만을 위한 푸짐한 한 상 차림이 마련돼 있었고 우리는 제대로 먹방을 선보였다. 첫 접시는 가족들이 주는 대로 밥과 찬을 골고루 배식을 받았더니 첫 접시부터 수북했다. 수북이 쌓인 밥과 반찬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맨손으로 조물조물 섞어 한입 크기의 양으로 만들어 먹었다. ‘그래, 바로 이 맛이지!’ 우리는 맛을 보자마자 행복을 참지 못하고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그렇게 세 접시를 비웠다. 마지막으로 실렛을 찾았을 때 아파서 밥을 못 해준 게 두고두고 맘에 걸렸는데, 잘 먹는 모습을 보니 행복하다며 언제든 밥을 먹으러 다시 오라고 했다. 아주 오랜만에 그리웠던 엄마 밥을 먹은 것도 좋았지만, 건강을 되찾은 엄마를 두 눈으로 확인한 것만으로 이번 실렛행은 충분한 거 같았다.


물론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다. 만나지 못한 친구들이 너무 많았다. 짧은 일정으로 인해 친구들을 지척에 두고도 일정 때문에 만나지 못했다. 시간이 너무 짧았고 일 욕심도 너무 부렸다. 기관으로 가는 길에 얼굴이라도 볼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아이들의 목소리로 가득했던 우리 동네 골목에 남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빌, 지한, 리무, 앞 골목 말썽쟁이 삼총사도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아뿌의 가족이 내가 있는 곳으로 잠깐이라도 얼굴을 보겠다고 걸음을 해주지 않았다면 정말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올 뻔했다. 덕분에 다른 지역으로 멀리 이사를 한 지한이네도 소식을 듣고 전화를 해주어 떠나기 전에 전화로나마 안부를 직접 물을 수 있었다. 살짝이라도 짬이 나면 친구들을 찾았지만 5년의 세월이 짧지 않았음만을 확인하고 돌아와야 했다. 첫날 방글라데시에서 처음으로 사귄 알라민과 알라민의 엄마를 만나기 위해 그들이 있던 곳을 찾았다. 몇 해 전 다카의 큰불이 났을 때 근처에서 일하던 알라민의 엄마와, 알라민의 안부가 너무도 걱정됐지만, 연락할 방법이 없어 애만 태울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둘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그들을 만날 수는 없었다. 도시의 건축 붐으로 거리에서 재봉 일을 하던 알라민의 엄마는 일터를 잃고 고향인 시골로 내려가 버렸다고 했다. 결국, 다음에 올 때 전해주겠다고 약속했던 앨범은 전해주지 못했다.


친구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며 곧 돌아오겠다고 다음 만남을 기약했고, 짧은 만남의 아쉬움을 달랬다. 그런데 코로나가 발생한 것이다. 올해 하반기 방글라데시를 다시 찾기로 했지만 귀국하자마자 코로나가 발생했다. 뒤늦게 첫 확진자가 발생한 방글라데시 코로나 상황이 심상치 않다. 현재 방글라데시 내 코로나 확진자 수는 26만 명, 사망자는 5,000명(8월 11일 기준)을 넘어섰다. 확진자 발생 수로는 현재 전 세계 15위다. 높은 인구 밀집도, 열악한 의료 시스템과 더불어 정부에서도 제대로 된 방역 대책이 내놓지 못해 코로나 확진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발생 초기만 해도 큰일이라 생각하지 못했는데, 겨울에 시작한 코로나는 무더운 여름 속에서도 여전히 열일 중이다. 사실상 코로나가 끝날 때까지 방글라데시 방문은 불가능해졌다. 한국으로 돌아와 직원과도 몇 차례 통화했다. 기관의 상황은 여전했고, 코로나로 인해 상황은 더 안 좋아졌다고 했다.


어떤 날은 정말 내가 다녀오긴 한 건가, 꿈을 꾼 건 아닌지 의심이 들기도 한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은 게 변해있었다. 시간이 이렇게 많이 흐른 지 그곳에 가서야 알게 됐다. 1월에 찍은 사진과 옛날 사진을 차례로 보다 보니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겠다. ‘앙띠바이야(이모오빠)~’라고 불러준 똥꼬 발랄했던 요 녀석이 이제 학교에 다닌다. 이 친구들 모두 자라는 모습을 꾸준히 오래도록 지켜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다음은 너무 늦지 않게 와야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방글라데시는 한 번도 내게 쉽지 않았다. 코로나로 인해 다시 또 기약 없는 기다림의 시작이다.


불가능한 변수가 참 많은 방글라데시. 이번뿐 아니라 매번 우리를 도와준 사람들이 있다. 무엇보다 안전하고 포근한 보금자리를 내어준 HH부부, 변수가 생길 때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발 빠르게 도와준 JJ부부. 그리고 피곤함에 찌든 이모들의 비타민씨가 되어준 J와 T. 우리는 비슷한 시기 방글라데시에 파견되어 함께 활동을 했던 봉사로 만난 사이다. 우리의 인연도 이제 10년이다. 우리가 이렇게 방글라데시를 오가며 프로젝트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좋은 방글라데시 사람들을 있었기 때문이지만, 프로젝트를 이어갈 수 있던 것은 제 일처럼 도움을 준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없었다면 방글라데시가 아무리 좋았어도 쉽게 용기 내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기다림 끝에 만남이라 짧은 만남이 미안하고 너무나 아쉬웠다. 다시 올게.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고마워. 나의 그리운 사람들.




유튜브에서 1월 방글라데시 방문 에피소드 영상을 볼 수 있어요. 링크는 ☞ 비하인드 스토리, 우리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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