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말을 부수는 말>
또 그분이 사고를 쳤다. 이번에도 그 입이 방정!
부끄러움은 왜 항상 국민 몫이어야 할까? 뱉어낸 말들을 얼마나 감당하고 있을까?
감당은커녕 수습할 생각조차 없는 것 같다. 대신에 여당이 숨겨진 메시지를 전달하며 해명하고(본인 빼고 다 오해하고 있는데, 처음부터 제대로 소통할 수 없었을까?) 외교부가 진땀을 빼며 수습하고 있다. 어찌 되었든 수습은 애당초 그분의 몫이 아니었던 것이다. 되려 이해 못 한 국민들을 꾸짖으며 큰소리친다.
비단 윤석열 대통령과 여당만의 문제는 아니다. 권력의 망언이 얼마나 정치적으로 치밀한 계산 아래 내뱉는지는 모르겠지만, (알고 싶지 않다.) 혐오를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정치 소통을 소통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무지하고 무책임한 권력의 막말은 왜 이렇게 반복되는 것일까? 왜 그들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것일까?
권력이 내뱉는 망언이 안보를 위협하고 국익을 훼손하고 국민을 양분시키며 분쟁과 갈등을 조장하며 사회를 불안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반복된다. 그들에게는 늘 많은 마이크가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내뱉으면 누군가는 알아서 메시지를 만들고 아니면 누군가는 수습할 것이다.
권력은 말할 기회가 너무나 많지만, 누군가는 말하기 위해 목숨을 건다. 저항의 말이다. 저항의 말은 권력의 말에 의해 왜곡되고 침묵되어 왔다. 빼앗긴 목소리를 되찾기 위해 고공 크레인에 오르거나 바닥을 기어 지하철에 오른다. 위험과 함께 지나친 비난도 감수해야 했다. 그들의 목소리를 귀담아들었다면 벌써 해결될 일이었다.
우리 삶 속에 있는 ‘권력의 말’과 ‘저항의 말’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말을 부수는 말>은 어떻게 말해야 하는 것만큼이나 어떤 말에 귀 기울여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p.8-9
내가 말하는 '저항의 언어'는 정확한 언어에 가깝다. 정확하게 말하려고 애쓴다는 것은 정확하게 보려는 것, 정확하게 인식하려는 것, 권력이 정해준 언어에 의구심을 품는다는 뜻이다. 권력이 저항의 언어를 항상 진압하는 이유다. 그 대신 권력의 기준으로 왜곡된 언어를 적극적으로 유포한다.
p.9-10
차별의 언어는 이처럼 촘촘하고 일상적이다. 언어는 일상의 감옥이며 해방구이고, 나와 타인을 공격하는 창인 동시에 방패, 연대의 끈이 될 수도 있고 배척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또한 무엇을 들어야 하는가. 한 사회의 문해력은 다양한 관계들의 뒤섞임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존재들에 대한 인식이 서로의 언어를 끌어안으며 세계를 확장시킬 것이다.
p.115
언어는 정치의 장이며 정치는 언어의 장이다. 공적 발화를 하는 사람일수록 타인의 억울함을 번역할 권력을 가진다. 그들은 위치에 따라 자신들의 억울함을 '공정'이라는 개념으로 번역하는 동시에 타인의 억울함을 무능력의 대가로 취급한다. 누구의 억울함을 번역할 것인가.
p.131-2
발언에 대한 논란이 일어나면 윤석열은 매번 자신의 발언이 왜곡되었으며 자신의 의도는 그렇지 않다고 억울해한다. 그는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 부단한 감정노동을 할 필요가 없는 권력자로 살아왔다. 해석하는 독자의 존재를 전혀 고려하지 않기에 의도를 과하게 내세운다. 자기 말을 못 알아듣는다고 사람들을 나무란다. 다시 말해, 상호소통의 의지가 없다. 내가 틀렸을 리 없다는 확신으로 가득하다.
p.177
가끔 여성들 중에도 나는 차별받지 않았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이 발언은 꽤 문제적인데, 차별을 지엽적이면서 개인적인 문제로 축소시키기 때문이다. '여성이 차별받는다'가 아니라 '차별받는 여성이 있다'로 논의의 지형을 바꿔버린다. 차별은 그저 개인적인 문제일 뿐이기에 차별에 제동을 거는 제도를 만들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사회의 제동장치가 없으면 차별에는 쉽게 가속도가 붙는다.
p.287
타자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을 표출할 수 있다는 게 권력이다.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감각이 없고,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앎을 적극적으로 모르려고 하고, 모르지만 판단할 수 있다는 확신이 모이면 바로 죄의식 없이 폭력을 저지르게 된다.
<말을 부수는 말>
이라영, 한겨레출판사, 2022
분야/페이지 | 사회과학 > 시사 / 36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