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일을 포기할까 고민했던 내게 지금의 회사가 손을 내밀어줬다. 감사함에 열심히 일했다. 내가 맡은 출입처에서 놓치는 건 없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날 선택한 걸 후회하게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강박관념이 생겼다. 대부분의 경력직이 그렇듯, 증명해 보여야 한다는 마음이 나를 지배했다.
하루에 4~5개, 퇴근 후에도 주말에도 관심사는 온통 일에 있었다. 당시 나를 지켜보던 업계 선배들은 너무 일을 많이 한다고, 그러다 지치면 답이 없다고 조언했지만 난 그 조언을 일종의 '인정'이라 생각해 더 열심히 일했다. 결국 이직하고 일 년뒤 번아웃이 와버렸다.
출근길에 과호흡이 왔고, 일이 벅차다 말 못 하고 밥을 먹다 울었다. 자꾸 멍해졌고, 말도 안 되는 오타가 늘었다. 그때 처음 '번아웃'을 알아챘고 상담을 받았고 거절하는 법을 익혔다. 아니 익혔다고 생각했다. 또 일 년 하고 반이 지나서 이제는 잦은 실수로 알아차렸다. 번아웃이 왔구나.
한 번은 리드 문과 본문이 다른 기사를 써냈다. 오전에 기사 쓰고 다음 취재 일정을 정신없이 보고하는 내게 상사는 "본인이 쓴 기사 다시 확인하시죠"라고 말했다. 그때까지 몰랐다. 내가 어떤 실수를 했는지. 한 번은 기자회견을 갔는데 내가 모르는 이가 서있었다. 여러 개를 챙기는 동안 똑같은 피해를 당한 피해자가 추가로 나왔는지 몰랐던 것이다. 단호히 장문의 메시지를 썼다. 지금 내 상태로 모든 걸 챙기기는 무리니 출입처 조정을 해달라고. 다음날 출입처가 조정됐다.
최근에는 일이 예전처럼 재밌지 않다는 말을 자주 하던 터였다.그렇다고 더 열심히 일해야겠다는 동력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무미건조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내가, 강제 휴식 속에 발견한 책이 <우리는 아직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김진영 다큐에세이/휴머니스타출판 그룹)였다.
다큐멘터리 PD인 저자는 갭이어(gap year)를 "내가 잘 살고 있는지, 내가 계획했던 방향으로 커리어와 삶을 잘 꾸려나가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잠깐 트랙에서 내려오는 시간. 타인의 삶의 속도와 방향이 치여 잃어버린 나의 중심을 회복하는 시간"(p.25)라고 말한다. 결코 지쳐서 일을 멈추는 시간이 아닌, 일과 삶에서 '영점 조절'이 필요한 순간 쉬면서 재정비하는 시간을 일컫는다.
저자는 자신 외에 총 7명의 갭이어를 가진 이들을 인터뷰한다. 다양한 직군과 삶의 방식 속에서 그들이 왜 갭이어를 택했는지, 갭이어를 택하며 가졌던 불안감, 그 이후 이야기가 나와있다.
광고기획자 김민지 씨는 3년 전 대기업 광고회사를 퇴사했다. 그녀는 "예전에는 '일=나'라고 생각해서 일에서 오는 성취감이나 만족감, 혹은 불만이 제 삶 전체를 흔들기도 했다"라고 회고한다. 이 부분에 격하게 동의했다. 번아웃이 찾아오기 직전에 나는, 하루치 기사 생산량의 최대치를 보여줬기에 줄곧 그 기대치를 맞추지 않으면 죄책감마저 들었다. 갭이어를 보내고 난 뒤 김민지 씨는 "월급은 노동의 대가라고 생각한다. 회사에도 못 하겠는 일이나 하기 싫은 일에 대해 더 논리적으로 말하고, 제 의사 표현을 더 명확히 할 수 있게 됐다"(p.118)고 말한다.
드라마 프로듀서로 일하다 퇴사한 이다솜 씨는 "일에 매몰되어 살고 있다고 생각했고, 방향을 잃은 것만 같았는데 쌓아온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게 정말 큰 위로였다"(p.50)고 말한다. 패션 디자이너로 성공하기 위해 잠을 줄여가며 일하다 번아웃을 겪고 경주 남상동에 스테이 '오소한옥'을 운영 중인 양자운 씨는 "내 삶의 속도를 알고, 이를 지켜내는 일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는 걸 잊지 않으려는 부단한 연습이 필요하다"라고 말한다.
인터뷰이들이 마음에 들었다. 모두 자신이 꿈꾸던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열심히 달리던 이들이었기에 '힘들다', '나는 못하겠다'는 말을 뱉지 못했다. 나 또한 꿈꾸던 직종에 들어왔고, 그랬기에 '힘들다'거나 '못하겠다'는 말을 못 했다. 무능함과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 같은 단어를 내 입으로 내뱉는 게 세상에 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다.
다른 퇴사 관련 책들에서 해결하지 못한 의문점이 해결됐다. '쉬고 난 뒤에 어떻게 할 건데'에 대해 각자가 택한 답까지 나와있으니 하나씩 생각이 정리됐다. 갭이어가 '도망'이 아닌 "좋아하는 일을 지속하기 위해, 더 건강하게 더 즐겁게 일하기 위해 이직이 아닌 다양한 방식으로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라는 반복적으로 나오는 설명이 좋았다. 그렇게 책장을 넘기고 넘기다 마지막 저자의 위로에 결국 눈물을 쏟았다.
우리가 보내고 있는 이 시간은 너무 열렬히 사랑했던 탓에 그 열기가 식는 과정일 뿐이며, 열기가 식는다고 해서 삶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 전해지기를 바란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만난 수십 명의 사례가 내게 응원과 위로가 되었듯이 부디 이 책도 누군가에게 그러한 응원과 위로가 되기를 (p.241)
저자의 마지막 문구에 감동한 나는, 책을 읽으며 평소에 결코 하지 않는, 책 마지막 부분에 담겨있는 질문과 답변을 빼곡히 채웠다. 그 결과, 난 아직 내 일을 사랑하고, 다른 선택지를 고민할 정도로 지치지 않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투덜대지만 기자를 그만두고 아예 다른 직무를 선택하고 싶을 정도로 질리진 않은 것이다.
다만, 갭이어를 알게 된 이상 언제든 지금의 일에 '멈춤 버튼'을 누르고 떠날 용기가 생겼다. 앞으로 채워나가야 할 짧으면 30년 길면 40년 이상의 노동의 시간은 내가 쌓아온 5년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길며, 더 즐겁게 그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는 언제든 '영점 조절'의 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