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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돌 Oct 29. 2024

에피소드6.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호랑이 선배님

< 실제 사례를 각색하여 서술하였습니다. >


L부장은 회사에서 인정받는 "능력자"다.

엔지니어로 30년 근속하고 정년퇴직을 한 직후에, 회사의 권유와 읍소로 다시 계약직으로 입사했다.

A시에 새로 건설한 공장에서 업무체계를 마련해주고, 현장을 진두지휘하고 이끌어줄 리더가 필요한데 그만한 적임자가 없다며, 회사는 이제는 그만 일하고 쉬겠다는 L부장을 어렵사리 모셔왔다.

비록 별다른 직함이 없는 "고문" 직책이었지만, L부장에게는 경력 단절이란 남의 일이었다. L부장은 회사 입장이 아쉬운 터라 다니고 싶을 만큼 더 회사를 다닐 수 있었으며, 심지어 다른 계약직들과는 달리 높은 연봉과 각종 혜택들(넉넉한 휴가, 차량유지비 등등)까지 받게 되었다.


그런 L부장에게도 흠결은 하나쯤, 좀 심각한 결점이 한 가지 있었다.

L부장은 깐깐하고 엄격한 원칙주의자에, 불같이 급하고 화를 잘 내는 성격이었다.

시분초를 정확하게 맞추어 들어오는 기차처럼, L부장에게는 사소한 예외란 결코 허용되지 않았다.

L부장은 본인 기준의 원칙을 어기는 직원에게는, 가차없는 호통과 고함, 심지어는 육두문자까지 날아들었다.

처음 보는 직원에게도 반말에 삿대질은 예사였다. L부장의 특별히 무례한 것 같지 않은 행동 속에도, 묘하게 아랫사람을 대하는 듯한 거만한 태도가 묻어있었다.


그래도 L부장이 정규직으로 회사를 다닐 때는 별 트러블이 없었다.

워낙 대선배이다 보니 다들 그러려니 했고, L부장이 험하게 꼬장을 부려도 중간에서 L부장과 봉변을 당한 직원을 어르고 달래며 분위기를 다독여주는 직원들이 많았다.

군사정권 시절부터 일을 배워온 터라 그렇다고, 업계의 전설은 역시 달라도 다르다고 오히려 L부장을 두둔하고 추켜세우는 여론도 있었다.




하지만 새 공장에서, 계약직으로 들어온 L부장의 "호랑이 리더십" 혹은 "말년병장 같은 거들먹거림"은 통하지 않았다.


일단 같이 일하는 직원들부터가 전혀 달랐다. 정규직 직원들은 한 팀이고 같은 식구라는 묘한 동질감과 끈끈한 연대의식으로 똘똘 뭉쳤는데, 새 공장에 들어온 직원들은 거의 대부분 프로젝트성 업무를 위해 채용된 경력직 엔지니어나 계약직 말단 직원들이었다.

새 공장에 들이는 인건비 등 비용을 최대한 절감하려는 회사의 방침 때문이었다. 한창 제자리에서 자기 몫을 다하고 있는 베테랑 정규직들은 그대로 둔 채, L부장과 같이 쓰임을 다한 사람을 불러들인 것도 그런 이유였다.

어쨌든 새 공장의 직원들은 정규직 직원들과는 달리 L부장이 본인들을 하대하는 태도에 그다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들은 L부장의 그런 특성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고, 못미더워 했으며, 이들 사이에는 L부장이 정신이상자거나 성격파탄자라는 소문도 펴졌다.

L부장의 급발진을 멈춰세우고, 열기를 식혀주는 중재자들은 이제는 아무도 없었다.


L부장 자체도, 정규직 부장일 때와는 달리 별로 권위가 없었다. 사실 "고문" 직책은, 어찌보면 한직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출근해서 느릿느릿 신문이나 뒤적이다가 스리슬쩍 빠져나와서 목욕탕이나 당구장을 다니는 뒷방 늙은이로 취급될 자리였다.

하지만 L부장의 자기확신과 책임감은 엄청나서, 고문이건 고문관이건 그저 정규직 시절 불도저처럼 달려나가던 모습 그대로였다. 이런 L부장의 "이상행동"을 직원들은 납득하지 못했다.

L부장은 자신에게 맡겨진 대로 공장 운영의 전체적인 그림을 잘 살피고 유용한 조언을 넌지시 건네는 그런 역할을 하는 대신, 현업에서 발로 뛰던 것처럼 직접 현장에서 닦고 조이고 굼뜬 후배의 엉덩이를 걷어차는 그런 위인이었다.

산업역군 L부장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그가 걸어온 길은 참 고되고 존경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여기서에는 찾을 수 없었다.




L부장에게 고성과 폭언, 폭행을 당했다는 피해직원들은 수두룩했다.

귀찮게 문제를 키우고 싶지 않아서 말을 안했다 뿐이지, L부장이 흥분하거나 직원들을 함부로 대하는 장면을 본 직원들도 많았다. (너무 일상적인 장면이어서, 안 본 직원이 없었을 것이다.)

회사는 이번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여기고, 문제투성이 L부장(L고문)과 더 이상 재계약을 체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래도 일말의 예우 차원에서, 계약을 중도에 해지하는 대신 남은 계약기간을 휴가와 대기발령으로 소진한 후에 계약 만료로 L부장을 떠나보내기로 하였다.


L부장은 이번 일을 계기로, 본인을 성토하는 여러 직원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듣게 되었다.

흡연자 특유의 가래가 섞인 카랑카랑한 L부장의 질책하는 목소리가 담긴 녹음파일을 들으며, L부장 스스로도 겸연쩍은 듯 했다.

요새 사람들 기준에는 잘못된 행동이지요 - L부장도 순순히 인정하는 모양새다.


하지만 L부장의 마음은 억울하고 헛헛했던 것 같다.

회사가 도와달라고 간청해서, 회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시 일하게 되었고, 현직에 있을 때처럼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했을 뿐인데, 이만큼 새 공장이 돌아가게 된 것도 다 내 덕인데 - 괜히 회사에 돌아왔고, 멋지게 은퇴할 수 있었는데 말로가 꼬였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노동위원회 통계에 의하면, 직장 내 괴롭힘이 발생하는 원인 중에 세대 차이가 주된 요인으로 손꼽혔다는 소식이 떠오른다.

그런데 더 나아가서, 이번 일은 세대 차이만으로 설명하기 힘든 여러 물음도 남긴다.

L부장 같은 구시대적인 인물이 계속 살아남아서 자기 행동을 수정하지 못한 건 L부장만의 탓은 아닌 걸까? 

그렇다고, L부장의 그런 잘못된 행동을 지적하지 못한(좋게 말하면, 이해하고 넘어가준) 후배 세대에게 잘못을 물을 수 있을까?

일을 잘하면(혹은 성과를 잘내면) 어느 정도의 결점은 허용해주는 게 맞는 걸까? (누가봐도 심각한 선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 허용 범위는 어떤 기준으로 정할 수 있을까?

L부장의 열정과 열의는, 누가 어떻게 감당해주면 좋은 쪽으로 흘러갈 수 있었을까?

회사가 비용 절감을 하겠다고 L부장을 굳이 모셔온 건, 약이었을까 독이었을까?

L부장 개인에게는 이번 일이 자신을 성찰하고 교정하는 기회가 될까, 회한과 원망만 남겨줄까?


L부장처럼 사용기한이 만료된 "부품"들이 하나씩 교체되면서, 사회가 점차 나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할 수 있을런지 모르겠다.

L부장의 쇳소리 같은 음성이, 낡고 삐걱거리는 나사가 빠지는 소리처럼 들린다.

그렇게 우리 사회 어느 한켠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책 페이지가 스르륵 넘어가듯 케케묵은 옛 시대의 잔재가 지나가는 모습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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