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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학이지지 Apr 12. 2023

[남미] 지구 반대편으로 도피



지구 반대편 남미로 엄마와 여행을 다녀온 후 시차적응이란 핑계로 잠 못이루고 있다. 한달 넘게 여전히 잠투정 많은 어린아이로 엄마와 함께 했다. 여행 중 가끔 엄마는 내 머리를 아주었고 물놀이 후 갈아입을 옷을 이고 다녔다. 매일 소풍날처럼 가방을 싸주고 밤마다 휴대폰 사용시간도 제한했다. 나로 인해 괴로운 나날을 보내는 엄마에게 등짝 맞을 만한 농담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려했지만 엄마는 알고 있었다. 내가 괜찮은 척 한다는 것을... 엄마의 숱한 눈물이 드넓은 호수와 바다에 가려지길 바랬다. 삶의 잔혹함과 죽음을 회피할 수 없음에 자연 앞에서 절망을 온몸으로 느꼈다. 무의미함이 나를 뒤덮쳤고 그저 하루 무엇을 먹고 볼지에 집중하며 본능에 충실하고자 했다.


집에서 나름 사랑 받는 아이였다. 누군가의 첫째 딸, 첫 조카, 첫 손녀. 그 처음이란 단어가 나를 특별하게 했다. 고맙게도 지금 를 버티게 한 소중한 자산이었다. 외할아버지의 애정표현이었던 머리 쿵을 그리워하며 고양이의 애정표현이 그와 같음을 알게 된 후 고양이가 좋아졌다는 말에 엄마는 울음을 터트렸다. 이 모든 사랑을 뒤로한채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매달렸었다. 결핍 속에 괴로웠고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하지만 알 수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고 기꺼이 그에게 사랑받기를 포기했다. 가족들은 이런 나를 다시 품어주었다. 잠을 자야만했다. 때문에 지구 반대편이어야만 했다. 낮밤이 바뀐 그곳에서는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나라도 제대로 보고싶었다. 이전처럼 모든 유명관광지를 다 돌고 싶지 않았다. 여행 전 엄마는 이번 여행의 목적이 나의 치료와 요양임을 수십번 강조했다. 미술관에서 많은 그림을 보기보다 단 한 작품이라도 그 앞에서 한 시간이상 머물고 싶었다. 분주함과 조바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정돈되고 편안한 여행보다 날 것 그대로 느끼고 싶었다. 그렇게 떠났다. 다른 딸들과 달리 효도관광이 아니라 엄마의 노후자금을 탈탈 털어 간 딸내미 A/S 여행이었다. 몸과 마음이 망가지고 질병으로 돈까지 잃은 딸년에게 A/S 여행이라니. 원금 회수는 커녕 마음고생으로 손해가 막심한데 잘 작동되기만을 바라는 게 이리 어려운 일일까. 30년 이상 사용했으면 제조사 과실이 아니라 사용자 과실인데 엄마는 자꾸 자책했다. 이런 모습을 보며 그나마 효년이라 생각했던 나는 이번 여행으로 딸년임을 확인했고 다시 효년이라도 되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

 

체력적으로 힘든 여행이었기에 그만큼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함께 한 여러 사람들을 통해 나를 돌아보고 나의 인류애를 확인할 수 있었다. 삶이 힘겨울 때 비로소 사람의 진짜 성격이 드러나기에 자아의 저급함과 무가치함을 직면할 수 밖에 없었다.

당연하게 생각하며 살았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았고 다른 이가 나를 속단하지 않길 바라면서 속단하는 나의 이중성에 놀랐다. 준비가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서로 도우길 바라는 기대 따윈 부서졌다. 엄마는 나를 다시 한달 간 먹고 입히고 데리고 다니며 다시 가르쳤다. 일, 놀이, 공부, 휴식 이 네 가지를 잘하기 위해서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어야하는지. 관계는 어떻게 맺어야하는지.


일상도 일탈도 아닌 그 어디쯤이었던 여행. 나는 이를 지구 반대편으로 도피한다는 말 외에 떠오르는 게 없었다. 낯선 자리에서 나를 확장하고 나에게 집중한 여행. 그 안에서 무엇을 택할지는 결국 또 내 몫이었다.


소중한 사람과 낯선 곳에서 발견한 새로움들이 앞으로의 삶에 기적이 되길 바란다. 걸음을 멈추지 않으면 언젠가는 닿을 것이라 믿는다. 가진 건 없지만 내면은 부자이고 싶다.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도 남에게 해를 끼치고 싶진 않다.


돌아오니 회사 없이 살기엔 턱없이 부족한 사람임을 깨닫는다. 돈 없이 산다는 건 참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돈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쉽지 않다. 다만 나의 용기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명확히 인식한다면 별 차이 없는 듯 보이는 선택의 결과에 좀 더 당당해질 수 있지 않을까. 갔다와서 어떻게 살 건지 이제 생각해보아야지. 일단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를 준 부모님께 감사하다.


이번 주는 한달 간 여행을 되돌아보고 남기고자 한다. 매일 적지 못해 아쉬움이 남지만 강렬하게 남은 느낌만이라도 간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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