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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진 Sep 13. 2018

익숙함과 소중함, 그리고 <나의 아저씨>

9월의 이야기 아홉

익숙함은 소중함을 잃게 한다. 익숙함을 형성하는 건 인생에 대한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자세다.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소중함을 매 순간 재정의 해야 어떤 게 나에게 가장 소중한 건지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소중함을 지키고 가꿔나갈 수 있다.


<나의 아저씨>의 박동훈 부장은 익숙함 속에 소중함을 잃은 존재다. 그는 그를 만년 부장으로 머물게 한 일상의 부조리 앞에서 체념한 채 살아간다. 삶에 치여서 멍하니 끌려 다닌다. 끌려 다님에 익숙해진다. 익숙함 속에 아내 강윤희를 빼앗긴다. ‘이것만은 내 곁에 항상 있을 것’이라고 안일하게 대했던 가정을, 그 소중함을 잃는다.


자신보다 더욱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꿋꿋이 들풀처럼 생존해 가는 이지안과 엮이면서, 그는 변한다. 일상의 부조리에 적극적으로 반기를 들기 시작한다. 승진의 영광과 가정의 행복을 가로막은 도준영을 무너뜨린다. 이사 자리를 쟁취한다. 아내에게 기회를 주고, 대화하며, 가정을 일으켜 세운다. 이지안을 돕는다. 박동훈 부장은 그렇게 익숙함의 굴레를 벗어난다.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를 재인식하고, 인생의 소중함을 돌려놓는다.


사실 <나의 아저씨>를 보면서 박동훈 부장과 이지안의 관계를 응원했다. 박동훈을 배신하고 도준영에게 간 강윤희의 행동을, 그 행동을 모두 감싸 안아 준 박동훈을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나의 아저씨>가 박동훈과 강윤희의 역사를 스토리텔링 해주지 않아서 그랬던 거라고 생각한다. 자의든 타의든 익숙함의 굴레에서 탈출한 박동훈이 가장 뼈저리게 후회한 건 ‘강윤희와의 역사’를 도둑맞은 것이었고, 드라마는 그 역사를 보여주진 않는다.


혹은, 내가 ‘배신감을 뛰어 넘을 정도의 소중함’에 공감 못했던 걸 수도 있다. 어떤 관계는 한 번의 외도 정도는 눈감아줄 수 있을 정도로 한 사람의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막대할 수 있다. 특히 그 외도가 일정 부분 자신의 수동성과 소극성, 그리고 익숙함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러니까 내가 박동훈의 선택에 공감 못했던 건, 내가 가진 관계의 소중함을 그에 상응할 만큼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던 결과다. 익숙함 속에 나의 관계는 지속적으로 평가절하 당하고 있었을 거란 소리다.  


최근에야 박동훈의 행동에 공감했다. 비록 인식하고 있지 못했지만, 최근 내 삶은 박동훈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어떤 것도 잘 풀리지 않는 일상에 익숙해졌다. 그 거대한 구조적 장벽을 어떻게든 돌파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어야 한다. 그런데 신세한탄만 하며 쳇바퀴 같은 일상만 반복했다. 수동성과 소극성의 마약에 취한 채, 내게 가장 소중한 존재에게도 익숙함을 되풀이했다.


그러던 한 순간. 그 익숙함이 모든 소중한 것들을 내게서 빼앗았다. 마약에서 깬 난 빈털터리 방랑자가 됐다. 다 잃을 위기에 처해서야 소중한 것을 익숙하게 대했던 나 자신의 모습을 후회했다. 경각심이 들었다. 배신의 아픔보단 잃게 된 것의 소중함이 더 크게 다가왔고, 떠나가던 것을, 인식하지 못했던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일부를 박동훈이 그랬던 것처럼 붙잡았다. 그리고 이지안을 만난 박동훈이 변했던 것처럼, 인생의 소중함을 돌려놓기 위한 투쟁을 해 나가기로 했다. 주체성과 적극성을 장착하고.


그러니까 난. 다시는 익숙함 속에 소중함을 잃지 않을 거다. 깨어있어야 한다. 익숙함에 취해선 안 된다. 매 순간 소중함을 재정의 해야 한다. 그 소중함을 온전한 내 것으로 간직할 수 있을 정도의 적극적인 삶의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이 쯤 되면 <나의 아저씨>와 박동훈 부장은 교훈이다. 소중함을 더 소중하게 대하라는. 삶의 피로에 찌들지 말라는. 무기력한 일상에 익숙해지지 말라는. 안 그러면 다 잃어버리거나, 다행히 다 잃진 않더라도 큰 고통을 받게 될 거라는.


그 동안 해야 한다고 느꼈으면서도 하지 않았던,

그런 사소한 일들부터 다시 차곡차곡 쌓아 올린다.

두려워하지 않고. 불안해하지 않고. 묵묵히. 최선을 다해서.






<나의 아저씨> 12회 中


강 :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박 : “너 애 엄마잖아.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지석이 생각했으면 그딴 짓 못했어. 애 생각 했으면 애 아빠를 그렇게 망가뜨릴 생각 못했다.”


강 : “난 항상 당신이 서열 1순위였어. 당신에게 난 뭐야? 나 지석이 낳고 삼칠일도 안 돼서 김장하러 갔어. 당신이 어머니한테 잘하는 거 제일 좋아하니까. 당신 하나 얻으려고 어머님, 도련님, 형님, 심지어 정혜 언니한테까지 잘하려 했어. 그런데 당신 한 번도 내 편이었던 적 없었어.” 


강 : “난 이 동네가 싫어. 당신 주위에 바글거리는 사람들도 다 싫어. 너무 억울한 게 사람들은 모른다는 거. 당신이 옆에 있는 사람을 얼마나 외롭게 하는지.”


강 : “내가 너무 싫어서 죽고 싶었어. 당신이 너무 불쌍해서 죽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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