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을 줄이러 갔다가 늘리고 온 날

- 의뢰서 속 '안정'과 데이터 속 '붕괴' 사이 -

by 날아올라


간호사 경력 15년.

그중 7년을 한 병원에서 수술 상담 간호사로 치열하게 근무했다.


긴 근속에 마침표를 찍은 표면적인 이유는 '이사'였다.

왕복 2시간의 출퇴근길은 고단했다.

무엇보다 육아에 전념하고 싶었고, 다섯 살 아들의 유치원 적응을 도우며 지친 몸을 쉴 수 있는 완벽한 기회로 여겨졌다.


이사와 동시에 새로운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았다.

빈손은 아니었다. 이전 병원에서 발급받은 진료 의뢰서와 의무기록 사본, 처방전을 꼼꼼히 챙겼다.


의뢰서에 적힌 '안정'이라는 두 글자는 일종의 보증수표였다. 의학적으로 증명된 '괜찮음'을 손에 쥐고 있으니 두려울 게 없었다.


발걸음은 가벼웠고 확신에 차 있었다.

퇴사로 스트레스의 원인 중 하나가 제거되었으니, 이제 약을 줄이거나 끊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익숙하게 각종 심리 척도 검사를 마치고, 추가로 뇌파 검사와 자율신경 균형 검사(HRV) 검사 후 진료실 문을 열었다.


"이전 병원 기록을 보니 2023년부터 치료받으셨네요. 산후에 많이 힘드셨나 봅니다."

주치의는 가져간 의뢰서를 훑어보며 물었다.


"네, 그때보단 많이 좋아졌어요. 퇴사도 했으니 이번 기회에 약을 좀 줄이고 싶어서 왔습니다."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실려 있었다.


주치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퇴사 이유를 물었다.

왕복 2시간의 거리, 육아와 병행하기 힘든 스케줄.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일하는 게 편하세요, 육아하는 게 편하세요?"

"일하는 게 편하긴 해요."


솔직한 대답이었다.

병원 업무는 통제 가능한 영역이었지만,

육아는 예측 불가능한 변수의 연속이었으니까.


그럼에도 퇴사를 선택한 건 약을 먹지 않으면 감정 기복이 널뛰고, 수면의 질이 급격히 떨어져서 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약을 안 먹으면 잠들기가 힘들고 중간에 자주 깨요. 감정 기복도 심해지고요."

"기록을 보니 지금 드시는 약은 용량이 아주 낮아요. 폭세틴 10mg에 자나팜 0.75mg. 약이 높진 않네요.

일단 오늘 검사한 결과를 좀 볼까요?"


주치의가 모니터를 돌렸다.

자신만만했던 기대는 그래프 앞에서 산산조각 났다.


"자율신경 균형 검사(HRV) 결과입니다.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 그래프가 겹쳐야 건강한 건데, 하나도 안 겹쳐요. 거의 10배 차이가 납니다. 자율신경 균형이 완전히 깨져 있어요."


교감신경은 긴장, 부교감신경은 이완을 담당한다.

그래프는 극단적으로 벌어져 있었다.


"몸이 극도로 피곤한 상태입니다. 신체적 스트레스를 엄청나게 받고 있다는 증거예요. 자율신경계 조절 능력이 바닥입니다."


주치의의 손끝이 화면 오른쪽의 막대그래프들을 가리켰다.

"여기 '프레셔 인덱스(Pressure Index)', 즉 압력 수치를 보세요. 정상 범위보다 너무 멀어져 있어요."

화면 속 수치는 잔인할 정도로 명확했다.


"몸이 받는 압력은 이렇게 폭발 직전인데, 바로 아래 '이모셔널 스테이트(Emotional State)'는 어떤가요?"

주치의가 가리킨 곳에는 초록색으로 찰싹 달라붙은 막대가 보였다.


"완전한 바닥입니다. 극도의 무기력 상태에요. 몸은 스트레스로 팽팽하게 당겨져 있는데, 마음은 이미 탄력을 잃고 축 늘어진 겁니다. 에너지가 하나도 없어요."


충격은 뇌파 검사(QEEG) 결과에서 정점을 찍었다. 화면 속 뇌파 지도는 스트레스로 인해 온통 붉은색 경고등이 켜져 있었지만, 유독 한 곳만은 섬뜩할 정도로 달랐다.


주치의는 비정상적으로 온통 파랗게 질려 있는 영역을 손끝으로 짚으며 입을 열었다.

"스트레스 지수는 64점으로 높고, 인지 기능 지수는 10점 미만입니다. 전두엽의 조절 기능인 알파파가 작동을 멈췄어요."


"문제가 되는 건 바로 이 '알파(Alpha) 파'입니다.

다른 곳은 과부하로 붉은데, 여기만 온통 파란색이죠? 마치 전원이 꺼진 것처럼요."


"파란색이면... 안 좋은 건가요?"


"원래 전두엽에서 실행과 감정 조절을 담당하는 친구인데, 지금 이 기능이 하나도 작동을 안 한다는 뜻입니다. 기분이 처질 때 덜 처지게 잡아주고, 갑자기 화가 치밀 때 막아주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끊어줘야 하는데... 그게 전혀 안 되고 있어요."



감정과 생각의 브레이크가 고장 났다는 뜻이었다.
왜 별것 아닌 일에 불같이 화를 냈는지, 왜 밤마다 불안한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잠들지 못했는지. 그 모든 것이 내 성격이 모나서가 아니라, 뇌의 조절 기능이 새파랗게 멈춰버렸기 때문이었다. 뇌는 과부하에 걸려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꼼꼼하고 완벽하려고 노력하는 성격이죠? 심리 도식 검사에서도 '엄격한 기준'과 '인정 추구'가 아주 높게 나왔어요."



주치의의 분석은 뼈아팠다.

"'나 괜찮아, 이 정도면 문제없어'라며 감정을 억누르고 참아왔을 겁니다. 그러다 뇌의 기능이 한계에 다다른 거예요. 지금은 약을 끊을 때가 아닙니다. 오히려 늘려야 할 수도 있어요."


모니터 속 붉은 뇌파 지도가 내 얼굴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15년간 견고하게 쌓아 올린 간호사의 이성이 '툭'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예고도 없이 눈물이 터졌다.


15년간 환자들을 돌보며 차트 속 수치는 그토록 예민하게 살폈으면서, 정작 내 몸이 보내는 붉은 신호는 철저히 무시해 왔다는 사실이 참담했다.


의뢰서에 적힌 '안정'은 약물로 쌓아 올린 위태로운 성벽일 뿐이었다. 진료실을 나오며 받아 든 처방전에는 줄어든 약 대신, 무거운 진실이 담겨 있었다.


"살고 싶은 대로 살아보겠다"며 퇴사를 감행했지만, '생존 시스템'은 이미 멈춰 있었다.


그날 고장 났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리고 그 인정이, 멈춰버린 나를 다시 돌리기 위한 '복구'의 첫걸음임을 비로소 깨달았다.



오늘의 증상

'이제 다 나은 줄 알았는데…' 약봉지가 두툼해진 것을 보며 치료를 실패한 것 같아 왈칵 눈물이 날 때.

늘어난 약기운 때문에 몸은 천근만근인데, 곁에서 해맑게 웃는 아이를 보며 '부족한 엄마'라는 짙은 죄책감이 밀려올 때.


마음 통찰

마음의 상처가 회복되는 과정은 결코 우상향하는 직선이 아닙니다. 좋아졌다가 고꾸라지기를 반복하는 엉킨 실타래와 같습니다.

약을 늘렸다는 것은 당신이 퇴보했거나 약해졌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의 뇌가 과거의 지독한 상처(트라우마)와 본격적으로 싸우기 위해 '더 강력한 방패와 무기'를 의사에게 요청한 것뿐입니다.

약을 늘려온 날은 실패한 날이 아니라, 상처의 뿌리를 뽑기 위해 안전망을 더 두껍게 깐 '용기 있는 날'입니다.


마음 처방전

1. 약을 먹을 때 부르는 '주문' 바꾸기

약을 입에 털어 넣으며 '내가 나약해서 이걸 또 먹네'라고 자책하지 마세요.

"이 약은 오늘 하루, 나와 내 아이의 평화를 굳건하게 지켜줄 든든한 방패야."

약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긍정적인 자기 암시로 바꾸는 것만으로도 약효와 심리적 안정감이 크게 달라집니다.

2. 육아 '절전 모드(Low-Power Mode)' 선언하기

약이 바꾸거나 늘어나면 뇌 신경전달물질이 적응하는 며칠 동안 극심한 피로, 졸음, 무기력이 동반될 수 있습니다.

이때는 휴대폰 배터리가 10% 남았을 때 절전 모드가 켜지는 것처럼, 육아의 기준을 대폭 낮추세요.

남편에게 명확히 알리세요. "며칠 동안 약 적응하느라 배터리 10%야. 집안일은 최소한으로 할게."

배달 음식을 먹여도 좋고, 평소보다 TV나 영상을 조금 더 보여줘도 괜찮습니다.

엄마가 무리해서 짜증 내는 것보다, 엄마가 약기운에 누워 쉬더라도 온화한 얼굴로 아이를 바라보는 것이 아이의 정서에는 백번 낫습니다.

3. '복약 일기' 대신 '작은 성공 일기' 쓰기

늘어난 약 용량에 집착하지 마세요. 대신 하루에 딱 하나, 오늘 내가 해낸 아주 작은 성공을 적어보세요.

"오늘 약기운 때문에 힘들었는데도 아이에게 짜증 내지 않고 넘겼다."

"정해진 시간에 빼먹지 않고 약을 잘 챙겨 먹었다."

당신은 지금 가장 무거운 마음의 짐을 짊어지고도, 아이의 세상(우주)을 지켜내고 있는 대단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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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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