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글
Wordpress 기반에서 작성했던 10년간의 기록을 모두 소실한 뒤 Medium에 남아 있던 유일한 한편의 글을 이 곳으로 옮기는 것에 의해 새 블로그를 시작해 본다.
기생충.
이 영화에 대한 후기를 쓰면서, “별루였다.”, “불편했다" 등의 기록을 남기는 건 “황금종려상"으로 세계가 공인한 영화에 몇 안되게 부정적인 후기를 남기는 특이한 사람으로 낙오될 수 있지만,
어렵고, 불편했다.
그렇다고, 영화가 별루 였다는건 아니고,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때 무언가 명확하지 않았고, 영화가 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내가 느낀 그런 거라면 더더욱 우리가 암암리에 공감하고 있는 사회적 진리를 공식화 해버린 느낌이라 “아, 그렇구나" 라는 탄식을 자아내야만 했다.
영화는 y축의 0점으로 기준으로 0점 아래와 0점 위의 계층이라는 이분화를 하고 x축은 계층에 종속된 삶의 질을 음과 양으로 나눈다.
즉, 1사분면과 3사분면 삶을 대비시킨다.
3사분면에서 1사분면의로 이동을 “계단”을 통해, “선을 넘는다"라는 대사를 통해 표현한다.
B1로 표현되는 반지하는 0점 아래다. 평창동 집은 언덕을 올라 정원에 진입해도 계단을 올라야 거실에 도착하고, 거실에서 안식을 취할 방으로 이동하려면 또 계단을 올라야 한다.
계층 간 쉼터는 그 계단의 수만큼이나 계층 차이가 존재한다.
오르기도 어렵지만, 다시 내려가려면 폭풍우를 맞으며, 터널을 지나 수없이 많은 계단을 내려가야 한다.
0점 위의 삶에서는 미국에서 직구한 텐트의 삶이, 0점 아래 반지하방 보다도 아늑하다.
반지하나 지하의 삶은 0점 아래에서 그들끼리 순환한다. 지하 벙커에서 변기통에 토하면 반지하집 화장실 변기통으로 솟구친다.
학력을 위조하여 0점 위로 변장 (영화에서는 영어 과외 장면에서 pretend라고 묘사)할 수 있지만, 반지하방 특유의 냄새는 DNA처럼 내재되어 그걸 벗어 던질 수는 없다.
내가 속한 계층은, 삶의 내음으로 드러난다.
죽음의 문턱에서 조차도, 계층간 감싸기는 현실이며, 사회적 소외 계층이라고해서, 죽음의 순간 소위 가진 자들의 연민을 받아 낼 수는 없다.
3사분면의 삶은 3사분면 안에서 그들끼리 순환하고 자족해야지, “선을 넘으려" 하면 1사분면 사람들의 불편함을 자아내고 다양한 불행과 위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
3사분면의 삶은 그 특유의 냄새가 있다. 그들끼리는 알아채지 못하는.
결국, 영화는 계층이동을 전혀 하지 못한채 기생하던 3사분면 삶들이 기생충의 잠복기를 지나 불편하고 비극적으로 표출되는 이야기로 마무리 했다.
넌지시, 우리는 비슷한 사람끼리 보이지 않는 장막을 치며, 자본주의의 경제적가치로 분단된 삶을 당연시, 그래서 익숙해져 불편한지도 모르고 지낼때, 영화는 지하 벙커가 가장 편안한다고 느끼는 대사를 통해,
계단을 오르락 내리락 하기 보다는 그 아래에서 비극 없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불편한 사회적 진리를 알려준다.
영상과 활자는 막연한 이야기를 진실화 화는데 가장 확실하다.
그래서, 불편했다.
그 불편 이면에, 정당한 노력과 성취는 한 계단씩 오르며 본연의 냄새를 달리하며, 어떠한 불행과 비극도 초래하지 않을 수 있어 라는 희망도 보았다.
#기생충 #계층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