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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다비 Dec 20. 2024

어쩌면 당신의 이야기

스물한 살, 나는 연애를 시작했다.

꽤 자상한 사람이었다. 사랑받은 티, 유복한 티가 났다. 집에 놀러 가면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와 누나도 밝고 좋은 분들이셨다. 그에게는 사랑받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와 따뜻함이 묻어났다.

그는 최신형 휴대폰을 사용했다. 전봇대에 가로로 매달리는 감각적인 광고로 홍보하던 기종이었다. 런던에서 한동안 살았다고도 했다. 컴퓨터를 어찌나 잘하는지, 무슨 화이트해커 대회에도 나갔었다나. 그 길로 나갈 것도 아닌데 그런 경력이 있는 그가 신기했다.

무엇보다, 사랑 표현을 많이 받고 자라서 그런지 사랑한다는 말을 진짜 잘했다. 너나 나나 좋으니까 만나겠지, 무슨 그런 낯간지러운 표현을 그렇게 자꾸 하냐.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는 여러 면에서 이전에 본 적 없는 캐릭터였다.


내가 똑같이 맞장구쳐주지 않아도, 그는 애정표현을 하는 것 자체가 즐거운 사람 같았다. 예쁜 말을 잘했다. 자신의 감정에도 솔직했다. 나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천진난만한 데가 있었다. 그의 예쁜 말 세례에, 내 마음의 빗장이 어느새 스르르 열렸나 보다. 그와 나의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가던 어느 날, 나는 나도 모르게 내 유년기의 추운 기억을 꺼냈다. 그를 믿었기에 꺼낼 수 있었던 이야기였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우리가 헤어지던 날,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부모님이 그렇게 싸우는 것만
보고 자랐으니
나중에 결혼하면 남편 하고도
그런 식으로 싸울 거야.



부평의 혼잡한 지하상가 안에서, 그 순간 지하상가 속 수많은 인파가 전부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세상에 혼자 버려지는 기분. 그의 말을 듣고 나는 그 자리에서 뿌리가 뽑힌 나무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내게 비수를 꽂고 정작 눈물 흘리며 집에 간 건 그였다.

생각했다. 감정의 잔고가 넉넉해 보이는 사람도 이별은 힘든가 보다. 그래서 상처 주고 싶었을 거야. 그가 울며 여러 번 뒤돌아 개찰구를 지났던 것은 내가 이별을 번복하길 바란 것이었을까? 그는 나를 그렇게 보고도, 내가 관계의 끝을 고하면 절대 돌아서지 않을 거라는 걸 몰랐던 걸까.


그와의 관계는 그렇게 끝났지만, 그의 말과 행동은 내게 많은 것을 남겼다. 나는 헤어진 이후에도 문득 그가 생각났다. 얼마나 솔직하게 기뻐했는지, 그리고 때로 슬퍼했는지. 그의 엉뚱하고 무해한 행동에 동참하면서 나도 사실은 얼마나 후련하고 재미있었는지 그때 조금만 더 표현해 줄걸, 후회가 되었다. 그를 통해, 나는 감정은 표현해야 된다는 걸 배웠다. 특히 좋은 감정일수록 더 표현하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그의 말은 상처였지만, 말이 나를 돌아보게 했고 지금의 나를 만든 계기가 되었다.


그때는 그의 표현이 너무 어색하고, 듣는 것만도 쑥스러웠다. 그전까지 나는 감정을 숨기는 데 익숙했다. 하지만 그의 반복된 고백과 따뜻한 말들에 조금씩 나도 나의 마음을 드러내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의 격려와 말들 덕분에 나는 한동안 꿈을 향해 나아갔고, 어쩌면 조금은 빛났던 것 같다. <무맥락 사랑고백>은 이제 내 주특기가 되었다. 우리는 잠시 뒤의 일도 모르니, 생각났을 때 표현해야 한다.

내 상처를 드러내 아픈 말을 듣기도 했지만, 후회는 없다. 솔직함에는 분명한 힘이 있기 때문이다. 문은 두드려야 열리고, 병은 낫기를 구하여야 낫는다고 했다.


언제나 고민한다. 솔직함이 무례함이 되진 않을지.

배려 없는 솔직함을 주의한다면, 솔직함 덕분에 열리는 문도 있다는 것을 보았다. 그가 남긴 말은 나를 아프게 했지만, 그 솔직함이 없었다면 나는 감정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 부모님처럼 나도 불행한 결혼생활을 할 거라는 그의 말이 틀렸다고 말하고 싶었다. 말뿐 아니라 삶으로 증명하고 싶었다. 좋은 사람이 되려는 노력을 계속 이어왔다. 

무엇보다, 남편에게만큼은 절대로 악다구니를 쓰지 않으려 노력한다. 엄마가 아빠에게 했던 무례함과 부족함들을 기억하며 나는 그런 아내가 되지 않으려 항상 주의한다. 그의 말처럼, 나도 모르게 ‘본 대로’ 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내 모든 글은 남편도 읽는다. 예민한 주제의 글일수록 나는 가장 먼저 남편에게 보여주고 피드백을 받는다.

또 우리는 이전에 지나간 연애사를 서로에게 숨기지 않는다. 우리가 서로의 과거를 숨기지 않는 이유는, 수없이 쌓여 지나간 어제들이 오늘의 우리를 만들어줬기 때문이다.


솔직함은 진정한 관계의 문을 여는 열쇠임을 나는 믿는다.









ps. 나는 남편의 전여친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분들이 남편에게 준 추억, 상처, 그리고 배움 덕분에 지금의 그가 만들어졌으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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