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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니는 여행 중 Dec 02. 2021

해먹은 낭만이 아니었나

가진 건 편도 티켓뿐, 240일간 이어지는 무계획 여자 혼자 남미 일주


망했다.


지긋지긋한 진흙 밭에서 넘어지기를 몇 번, 결국 입고 있던 레깅스가 찢어져 버렸다. 더 이상 짜증을 낼 힘도 소리를 칠 기운도 남지 않아 그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박 삼 일간 걷는 동안 해먹에서 잘 수 있다는 로맨틱한 광고 문구 한 줄에 반해 국립공원 안에 들어온 지 단 반나절 만이었다. 


얼마나 큰지, 어떻게 생겼는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아무런 정보도 없이 면 레깅스에 샌들을 구겨 신고 들어간 대가를 단단히 치르게 되었다.

정식 명칭은 국립공원이나 사실 그냥 아무렇게나 방치된 정글의 모습이었다. 이렇다 할 이정표도 제대로 된 지도조차 없어 이 안에서 몇 명 정도 사라져도 아무도 모를 것 같았다. 길치인 내게 평소처럼 도움을 줄 구글 지도 따위는 당연히 작동하지 않는 늪지대 속에서 끊임없이 길을 잃었다.



언젠가 폭풍우라도 지나간 건지 바닥은 온통 진흙 밭이었다. 도마뱀이나 개미 떼, 개구리, 거미 등이 진흙 사이사이 마구 엉켜있어 믿지도 않는 가상의 존재에게 몇 번이고 기도를 올렸다.
"신이시여, 제발 개구리만은 밟지 않게 해주세요…. 차라리 도마뱀이 낫습니다."

이 나무가 저 나무 같고, 이 진흙탕이 저 진흙탕 같은 데자뷰에 누구라도 붙잡고 도와달라고 애원하고 싶었지만 몇 시간을 걸어도 도무지 사람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입장할 때 건네받은, 쓸데없이 어린이용 동화책 속 삽화 같은 귀여운 그림이나 그려져 있는 거친 약도 하나를 목숨처럼 껴안고 끊임없이 직진했다. 그 외에는 기댈 것이 없었기에. 약도를 보니 기본적으로 직진만 하면 국립공원의 중반쯤에 위치한 캠핑장에 도착해야 하는데 차마 ‘길’이라 불릴만한 존재는 없었고 계속 나무와 나무 사이를 헤집으며 좌로 우로 움직여야 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고픈 배에 속이 쓰려질 때쯤 먼발치서 파도 소리가 느껴졌다. 착각이 아니었다. 야자수 너머로 갑작스레 바닷가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토록 그리워하던 사람을 마주할 수 있었다. 구조 헬리콥터라도 나타난 기분이었다. 이제 난 살았다. 


친구와 함께 수영을 즐기고 있던 아르헨티나 소녀는 이 국립공원의 지리에 매우 익숙해 보였다. 캠핑장을 찾는다고 묻자 망설임 없이 뒤쪽 방향으로 직진하다 보면 나온다는 (그놈의 직진! 또 직진!) 간단 명쾌한 대답을 주었다. 혹시 일정이 어떻게 되냐고 묻자 본인은 이미 나흘째 이곳에 머물러 캠핑을 즐기고 있다고 한다. 역시, 고수의 느낌이 난다 싶었다. 


이들은 아예 본인의 텐트를 매고 들어온 모양이다. 바다 앞에 펼쳐놓은 아늑한 텐트와 지난밤엔 캠프파이어라도 벌인 듯 나뭇조각들이 한데 모여있는 모습이 그들만큼이나 자유분방해 보였다. 나 외에 단 한 사람이라도 이 정글 속에 머물고 있었단 사실이 대단히 안심되었다.



그들에게 감사를 표한 뒤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말대로면 곧 그놈의 해먹에 다다를 수 있다. 그러나 빠른 발걸음은 금세 멈춰질 수밖에 없었다. 뒤로 돌아 직진 하라 했는데…. 하필이면 그 길엔 유난히도 크고 깊은 웅덩이가 자리하고 있었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짙은 갈색 빛깔 물에 절대로 다리를 넣을 수 없었다. 그대로 끌려 들어가 버릴 것만 같았다. 이런저런 궁리 끝에 근처에 널브러져 있던 두터운 나뭇가지들을 이어 간이 다리를 만들어 보았다.

"빠르게 밟고 지나가면 가라앉지 않고 넘어갈 수 있겠지? 하나, 둘, 셋… 가자!"


안타깝게도 글러먹은 소리였다. ‘셋’을 외치며 밟은 나뭇가지는 내 몸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옆으로 빙글 돌더니 나를 그대로 진흙탕 속으로 처박았다. 정말이지 울고 싶었다. 이젠 다리뿐 아닌 팔과 몸통까지 온통 흙색이 되어버린 내 몰골에 해먹이고 나발이고 그냥 여기서 나가야겠단 생각만이 들었다. 한치의 미련이 없었다. 나는 여기서 포기한다.


입구를 향해 돌아가는 길 금세 다시 마주하게 된 바닷가. 잘 찾아갔을지 걱정이 된 건지 내가 걸어나간 길 쪽을 바라보고 있던 그들과 어쩔 수 없이 눈이 마주쳐버렸다. 포기했다고 말하기가 창피해 조용히 지나가려던 참이었는데 말이다. 그들은 한 걸음에 달려와 내게 안부를 물었다.

"나…, 도저히 캠핑장을 못 찾겠어!"

울먹이는 나의 표정에 결국 그녀는 캠핑장까지 동행을 자처했다. 


"제니, 정말 코앞이야. 같이 가줄게. 걱정마 내가 길을 잘 알고 있어." 거절할 새도 없이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앞서 나갔다.


역시나 그녀는 그 크고 깊은 웅덩이가 있던 길로 안내했다. 그래, 나도 알아. 아까도 여기까진 왔었어. 근데 저 웅덩이를 도저히 못 넘겠단 말이야…! 볼멘소리가 목 끝까지 차올랐다.
그런데 차마 저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순 없었다. 샌들이라도 신고 있던 나와는 달리 맨발이던 그녀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웅덩이에 다리를 풍덩 넣어 건너편으로 건너갔다. 너무도 당찬 모습에 차마 못 하겠단 말을 하지 못하고 두 눈을 질끈 감고 그녀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오른 다리 풍덩, 왼 다리 풍덩. 으. 차갑고 찐득 했다. 샌들 아래엔 진흙이 잔뜩 달라붙고 레깅스는 무릎까지 온통 더럽혀졌다. 그렇지만… 그게 다였다. 그 속엔 사악한 악어도 내 발을 잡아 끄는 물귀신도 없었다. 놀랍게도 그 웅덩이를 넘자 드디어 ‘길’이라고 불릴 만한 멀끔한 계단이 등장했고 계단 너머로 캠핑장이 등장했다. 이렇게 코앞에 두고선 포기하려 했다니! 바로 앞이었는데, 정말 바로 코 앞 여기였는데….



길을 헤매는 동안 이런 곳에 있는 캠핑장은 분명 형편없을 거라고 저주를 퍼붓던 모습이 창피하게도 그저 안락하고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당나귀들이 자유롭게 뛰어다니고 고양이들은 오후의 햇살을 만끽하고 있었다.


여행을 길게 지속하는 동안 나름대로 더러운 것도 힘든 것도 다 잘 견디는 강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나 보다. 여전히 마음속은 나약한 서울 소녀였다.
바닷가에서 마주친 친구들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이 국립공원과 산타마르타를 영원토록 저주했을 테다. 그깟 진흙탕, 밟더라도 그냥 씻으면 그만인 것을 지나치게 겁을 냈다. 막상 저지르고 나니 별것도 아닌 것을.
 
야외 간이 화장실에서 간단히 물 샤워를 하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무게 걱정에 샴푸조차 챙기지 않은 가벼운 가방 속에 다행히 잠옷 한 벌은 있었다. 비록 이제부턴 ‘잠’옷이 아니라 이틀간 꼼짝없이 입고 있어야 할 유일한 옷이 되어버렸지만.


샌들 모양 그대로 타버린 피부


간이식당에서 생선구이를 사 먹고 부른 배를 통통 두드리며 해먹에 늘어져 있었다. 고양이들이 일기를 쓰고 있는 내 옆에 꼭 붙어 자꾸만 야옹야옹 소리를 낸다. 내게 오늘 하루 수고했다는 말을 해주고 있으려나.
 

첩첩산중이니만큼 해는 금방 저물었고, 바라던 대로 별들은 빽빽이 떠올랐다. 건물한 채 없는 정글 속 하늘에 가득 들어찬 별은 마치 내가 스노우볼 속에 들어와있는 듯한 기분을 주었다. 동그란 세상 속 오직 나와 별들뿐. 

밤 하늘을 바라볼 때면 언제나 그렇듯 오늘도 ‘Lost stars’를 한 곡 반복으로 설정해두었다.



Please don’t see just a girl caught up in dreams and fantasies.
Please see me reaching out for someone I can't see.

/ Keira Knightley - Lost stars 중에서



문득 피식 웃음이 났다. 해먹에 누워서 별 좀 보자고 하루 종일 생고생을 했구나. 고작 몇 시간이나 지났다고 고래고래 생짜증을 냈던 낮의 그 모든 시간들이 이제는 그저 웃음이 나는 추억으로 변했다. 내일은 흙 웅덩이 앞에서 좀 더 당당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야겠다.


멍과 상처 투성이가 된 다리





내일은 어디서 눈을 뜰까요

가진 건 편도 티켓뿐, 240일간 이어지는 무계획 여자 혼자 남미 일주

By. 제니 (@hyeziin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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