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 건 편도 티켓뿐, 240일간 이어지는 무계획 여자 혼자 남미 일주
에콰도르에 도착한지도 어느새 15일.
'가난한 자들의 갈라파고스'라는 별명이 붙은 항구마을 푸에르토 로페즈에 다달았다.
갈라파고스라는 이름이 왠지 익숙한가 싶다면 그 느낌이 맞다.
페루하면 마추픽추, 볼리비아하면 우유니 사막, 그리고 에콰도르하면 갈라파고스로 통한다. 그러니 이 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인 셈이다.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 탄생된 곳이기도 하며 사람보다 바다사자와 물개, 거북이의 수가 더 많다고 알려진 태초의 자연을 보유한 섬이다.
이런 어마어마한 장소를 코앞에 두고 있음에도 나는 그저 갸우뚱한 마음이었다. 수영도 못하는데 고작 1시간짜리 비행기에 백만원을 태울만한 가치가 없었달까, 끌리지 않았다.
그 대신 향하게 된 곳이 바로 가난한 자들의 갈라파고스. 에콰도르 서쪽 끝의 어촌마을이었다. 이곳에서도 갈라파고스의 명물 파란 발 부비새와 고래 관찰을 할 수 있다는 말에 고민할 것이 없었다. 나같이 가난한 배낭여행자에게 딱 어울리는 장소다.
이튿날 푸에르토 로페즈 마을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고, 간만에 슈퍼스타 행세를 할 수 있었다.
단골 질문 "De Donde Eres? (너 어느 나라 사람이야?)"도 얼마 만에 들어보는 건지. 그간 에콰도르의 수도이자 대도시인 키토에서 머물렀기에 잊고 있던 감정이었다.
남미 사람들이 얼마나 순수한지 아는가, 이러한 관심 속에서 근사한 스페인어를 구사할 필요가 없다. "안녕 나는 한국인이야!"라는 짧은 한 마디만 내뱉어도 이미 사람들은 잇몸이 만개한 미소를 짓고있다.
그리고 거기서 딱 한 마디만 더 해주면 된다. "네 이름이 뭐야?". 그 이름을 그대로 한국어로 바꿔 적어주기만 하면 끝이다. 이것만으로도 상대방은 나의 포로가 된다. 이제부턴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박수 치며 맞장구를 쳐준다. 같이 간식을 나눠먹으며 신나게 얘기 나누다 보면 5시간짜리 버스도 거뜬하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건지 어느새 진한 바다 냄새가 올라온다.
"너 여기서 내려야 해!" 주변의 아저씨들은 너도나도 손을 들고 내가 내려야 한다고 알려준다. 이 마을은 시작부터 참 좋다.
하차 후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일단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곳을 향해 움직였다. 나의 남미여행은 당장 오늘 어디 누워 잠들지조차 정하져 있지 않는 편이었기에 늘 이 마을의 분위기를 보는 게 중요했다.
마음에 든다면 2박 쯤, 아니라면 내일 바로 다음 도시를 향해 바로 내려가야겠단 생각을 하며 제법 분주한 모양새의 부둣가를 향해 걸어갔다.
세상에나 부두에는 어부들이 잔뜩이었다.
지금이 아침 10시 남짓이니 분명 밤새 바다와의 싸움을 통해 쟁취했을 테다. 마치 전리품처럼 배 곳곳에 종류별로, 크기별로 예쁘게도 늘어놓은 모습이었다.
물고기는 배에서 건져져 하나하나 판매대로 옮겨졌다. 보자 하니 여기서 곧 큰 시장이 열릴 것 같았다.
물고기와 사람 사이를 미어캣처럼 돌아다니는 동양인은 무조건 눈에 띌 수밖에 없었는지 어느덧 사람들도 나를 인식하기 시작했고,
그 끝에 한 어부에게 "너 이 물고기 한 번 들어봐!"라는 호탕한 제안을 받게 되었다.
시키는 일은 거절하는 법이 없는 나다. 내 상체만큼 커다란 물고기를 당당하게 잡아들었고 (여전히 숨이 붙어있는..) 삽시간에 주변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주변에서 너도나도 말을 걸기 시작했다, 역시나 단골 질문 먼저 등장할 수밖에.
"De Donde Eres? (너 어느 나라 사람이야?)"
"Soy Coreana. (나는 한국인이야)"
나는 분명 한 마디의 대답을 했을 뿐인데 이 대답은 마치 메아리가 퍼지듯 아저씨들의 입과 입으로 시장 한 바퀴를 돌게 되었다.
(웅성웅성) 한국인이래! 한국인이라고? 한국인이야! 한국인?
이걸 듣고 있자니 나 역시도 웃음이 날 수밖에.
좋았어, 이 마을엔 3일 이상은 꼭 있어야겠어. 이렇게나 사소한 이유로 결단을 내렸다.
바닷가 마을은 세계 공통이다. 해변을 앞에 두고 가로로 숙소 수십 개가 우후죽순 모여있기 마련이다. 차례대로 들러보며 금액을 묻고 다녔는데, 그중 '바닷바람 호스텔 (brisa marina)' 아주머니는 내가 입장할 때부터 굉장히 자신감 있는 표정이었다.
"길 건너에 천막 보이지? 저기가 우리 식당인데 거기 밤에는 디스코테카야."
세상에! 디스코테카는 못 참지. 사실 호스텔 이름부터가 얼마나 낭만적인가.
바닷바람 호스텔.
그자리에서 바로 3박을 예약하게 되었다.
자랑하셨던 식당에서 갓 튀긴 생선요리를 배부르게 먹고는 바닷바람을 느끼며 한참을 앉아있었다.
3일 후에는 과연 이 마을을 떠날 수 있을지 벌써부터 걱정이다. 도착한지 얼마나 됐다고 또 사랑에 잔뜩 빠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