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은, 전남친 잊으려고 남미에 왔어

가진 건 편도 티켓뿐, 240일간 이어지는 무계획 여자 혼자 남미 일주

by 제니는 여행 중

퇴직서를 낼 때만 해도 어디로 가야 할지 언제쯤 떠나야 할지 특별한 계획은 없었다.

퇴사자에게 남는 건 시간이었고 나는 고작 스물네 살이었다.


유럽에 가서 예쁜 원피스나 잔뜩 입다 올지 동남아에 가서 하루 종일 누워만 있어볼지, 콧노래를 부르며 가볍게 여행 일정을 짜던 나의 마음은 어느새 기필코 대한민국에서 가장 먼 곳까지 가야겠다는 확신으로 바뀌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이별 때문이었다.

첫사랑과의 헤어짐은 한국에서의 삶 자체를 증오하게 만들었고 지구 반대편으로의 이동을 꿈꾸게 만들었다.

남미의 성수기인 겨울에 맞춰 출발 해야 맞았지만 고작 초봄을 지나던 그 시기의 내겐 겨울까지 버틸 힘이 없었다.

결국 손에 쥐어진 것은 9월 페루행 비행 티켓.


"엄마, 나 5개월 뒤에 남미 갔다 올 거야"


평온한 목소리와 다소 그렇지 못한 내용.

잠깐 친구 만나러 집 앞 편의점 좀 다녀오겠다는 것과 다름없던 내 말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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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 여행의 이유이자 목표가 무려 '전남친 잊기'였다니, 스물 네살의 나는 청춘 그 자체였다.


매일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고 다시 흩어져야만 했던 콜롬비아에서의 일정과는 다르게, 일주일 넘도록 아침저녁으로 붙어있던 K에게는 남다른 정이 붙을 수밖에 없었다.

*K에 대해선 이전화 참고


함께 좋은 음식을 먹었다. 예쁜 카페를 찾아갔고, 전망대에 올라 한참이나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같이 할로윈 파티를 즐겼고, 번지 점프를 했고, 가라오케에도 다녀왔다.

동네 시장에 갔고, 다운 받아 온 한국 영화를 보기도 했다.

폭포와 산에 가고 싶어 했던 나와 마을에서 사진을 좀 더 찍고 싶어 했던 K는 이따금씩 떨어지기도 했지만 결국 다시 만났다. 굳이굳이 다시 키토로 돌아만 갔다.

그렇게 11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어떤 도시에서도 이렇게 긴 시간 머문적이 없었다.


문득 이러다 적도선을 넘어가겠다고 느껴지던 그때, 우리는 함께 칵테일을 마시고 있었다.

둘 중 누구도 우리의 관계를 단어 하나로 쉽사리 정의하려 들지 않았다.

그저 칵테일만을 들이켰고 결국 K는 먼저 입을 뗐다. "끝을 알고 있었잖아."

무려 20초는 더 지나서야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나였다.

한 사람만 보며 한 도시에 머물다 보니 잠시 잊고 말았다. 우리는 여행자였다.

둘 중 누구라도 용기를 냈어야만 했는데 고맙게도 K가 용기내어 그 끝을 내어주었다.


나는 페루를 향해 그는 콜롬비아를 향해 다시 움직여야만 했다.

이튿날 키토를 먼저 떠난 것은 K다. 버스 터미널로 향하는 택시를 탄 그의 뒷모습을 끝으로 하염없이 멀어져만 갔다.


다행히도 이번의 이별은 눈물이 아니라 미소를 주었다.

덕분에 내가 다시 사랑이란 걸 시작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느꼈기 때문일 테다. 마음 속에 대문짝만하게 자리 잡혀있던 전 남자친구의 존재는 어느덧 많이도 작아져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의 만남은 가치 있었다.



지금의 나는 당시 내가 K를 사랑했던 것이 아니라, 사랑이란 감정을 사랑했던 것 같다고 생각한다.

11일을 투자해서 사랑을 배웠다면 분명 값진 시간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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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가 남겨준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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