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선을 넘어가면 남반구예요

가진 건 편도 티켓뿐, 240일간 이어지는 무계획 여자 혼자 남미 일주

by 제니는 여행 중

나라의 이름 자체가 '적도'인 에콰도르.

남반구와 북반구를 가르는 선이 있는 나라.

솔직히 그게 내가 이 나라에 대해 아는 유일한 부분이었다.

기껏해야 일주일쯤 있으려나, 넌지시 예상했던 이 작은 나라에 결국 3주를 머물게 되었다.


그 시작은 한인 민박이었다.

히치하이킹과 카우치서핑을 일삼고 숲속 해먹 위에서도 밤 새 잘 자는 내가, 고귀한 한인 민박을 예약하다니.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남미 여행을 준비하며 강연을 여럿 찾아다녔는데 그때 K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그의 강연 마지막 멘트가 '저는 이번 가을, 중남미로 향합니다.'였고 순간, 이건 운명이다! 생각하며 용기 내 다가가 말을 걸었다. 나도, 그때 남미에 있을 거라고.


그 후로 반 년의 시간이 더 흐른 후에야 우리는 서로를 다시 마주할 수 있었다.

나는 반시계 방향으로 브라질을 향해 내려가는 일정인 반면, K는 시계 방향으로 콜롬비아를 향해 올라가는 반대 방향으로의 여행길이었는데, 다행히 딱 하나의 도시에서 시간이 맞게 된 것이다. 바로 에콰도르의 수도 키토.


이미 한인 민박을 예약해 두었다는 말에 같은 숙소를 예약했다.

그간 5주 넘도록 콜롬비아의 변변찮은 장소들에서 고생했으니, 한 번쯤은 괜찮겠다는 보상심리도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민박집은 실로 위대했다. 전기장판이라니! 계란이 올라간 김치볶음밥에 멸치조림과 시금치무침 반찬이라니!

2인분을 배 터지게 먹고서야 만족스럽게 수저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심지어 무계획이던 나를 위해 근처 명소와 맛집까지 섬세하게 추천해 주는 모습에 주인 부부에게 반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게 얼마 만에 쓰는 한국어야! 다른 투숙객들과 함께 밤늦도록 맥주를 마시며 흥건히 취해갔다. 이야, 이래서 이 값 주고 민박집 오는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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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K는 자연스럽게 키토에서의 모든 일정을 함께했는데 우리는 각자의 역할이 분명했다.

스페인어를 하는 나는 택시비 흥정이나 음식 주문을 도맡았고, K는 늘 고오급 DSLR 카메라를 여분 렌즈까지 함께 들고 다녀 인생샷을 잔뜩 남겨 주었다.


그는 나를 만난 첫날 말했다.

"저는 사인을 모아요."

제법 두툼한 낡은 노트를 꺼내 빈 면을 펴 그곳에 사인과 함께 인생 모토를 적어줄 수 있냐고 물었다.

그 후엔 카페의 직원에게도, 트래킹 길에 마주한 가족에게도, 민박집에 머무는 다른 투숙객에게도 같은 것을 물었다.

사인을 부탁하면서 스몰 토크가 시작되었고 함께 사진도 남기며 SNS의 팔로우 숫자를 늘리기까지 하는 모습이 다분히 감탄스러웠다. 나만 생각하며 여행하던 내게는 새로운 방식의 여행이었다. 역시 여행 인플루언서는 뭔가 달라도 다르다며 양손으로 엄지척을 보내주었다.


반면 그는 오히려 내가 부럽다고 했다. 이미 여행한 국가 수가 100개국이 되어가던 그는 남미 여행도 이번이 두 번째였다. 사실 풍경에서 받는 감흥이 없어서, 그래서 이런 걸 시도하게 되었다는 그의 말.

걸음 마다마다 사진을 찍고 박수를 치며 매 순간을 즐기는 내 모습을 보며 여행을 처음 시작할 때의 자신을 떠올리며 그리워하던 K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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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갔던 적도 박물관에서는 이런 얘기를 들었다. 이 을 기준으로 북반구와 남반구가 갈린다고, 이 선을 넘어가는 순간, 북반구인 셈이라고.

그래서, 적도선 위에 서있는 지금은 동그란 계란조차 못 위에 안전히 올라 앉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비록 직원이 설명해 준 것만큼 손쉽지만은 않았지만) 계란을 무사히 올려놓은 후 K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우리는 지금 적도선 위에 있어서 서로에게 흔들리지 않는 중일 거라고.


든든한 여행 메이트가 문득 지나치게 든든하게 느껴지다가도 선을 넘어선 안된다고 생각했던 나날이었다.

각자의 여행길에 방해가 될 수 없었다. 그저 적도선 안에 안전히 멈춰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하루이틀이면 충분할 것 같던 키토에서의 일정이 자꾸만 길어지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너도 나도 빠르게 떠날 수 없던 그 작은 적도 마을은 어떤 의미였을까.


DSC06377.JPG 적도선 위에서, 위도 0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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