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을 할까?' 한 번이라도 고민이 된다면 펼치자
비건으로 가는 길은 다양하다. 나에게는 누룽이가 그 길이었고, 멋진 언니(대명사다)에게는 아토피와 유튜브의 동영상들이 시작점이었다. 이 책의 저자 김한민에게는 강아지 '난희'가 그랬다고 한다. 그도 나처럼 고양이 한마리에서 시작되는 (또는 어느 '타자'에서 시작되는) 일련의 변화들이 있었으리라.
나의 첫 고양이 누룽이를 만나고 얼마 안되어 나는 수의사가 되기로 했다. 누룽이와 수의사 사이에는 여러가지 일들이 있었지만 어쨌든 그렇게 마음을 먹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누룽이는 곧 나의 두번째 고양이 사랑이를 불러왔다. 어느새 나는 동네 고양이들이 눈에 밟혀 캔 하나는 꼭 가방에 넣고 다니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플라스틱에 든 음료는 사먹지 않았다. 매장 내에서 마시는 데도 굳이 일회용 컵에 커피를 담아주면 꼭 한 마디 하게되었고, 그런 곳은 잘 가지 않게 되었다. 어느 날은 친구와 자전거로 강변을 달리고 있었는데, 나의 자전거 밑으로 개미가 지나가는 걸 보고 나도 모르게 '악' 소리를 질렀다. 뒤따라 오던 친구에게 미처 자전거를 세우지 못했다고 하자 "이제 스님 될꺼야?"라며 깔깔댔다. '그래, 언젠가 그렇게 될 거 같아.' 내 앞날이 어떻게 펼쳐질 지 알겠는 그 느낌, 찰나지만 확실했다. 2년의 수험생활 끝에 나는 수의대생이 되었고 코로나와 함께 한 학기를 보냈다. 수험생 2년 동안 미뤄둔 모든 감각과 생각들이 생생해지는 나의 첫 여름방학. 이 책을 펼친 것은 이렇듯 우연은 아니었다.
나는 비건이 아니다. 아직은. 전보다 육류소비를 좀 줄였을 뿐이다. 왜 아직일까 하면 두 가지 이유였다. 첫째로 비건은 불편하다. 집에서 요리를 해먹지 않는 이상 육식 위주인 식단을 피해나가기 힘들다. 아침에 시리얼을 먹자니 우유가 걸렸다. 간단한 한끼가 되었던 삶은 계란도 그랬다. 여럿이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식사는 아무래도 삼겹살이나 회였다. 편의점 도시락도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것은 없었다. 샐러드조차도 닭가슴살 아니면 치즈였다.
둘째로 비건은 번거로웠다. 식당에 가면 재료에 대해 물어야했고 누군가와 식사를 하게 되면 양해를 구해야 했다. 이건 분명 에너지가 드는 일이었다. 별난 사람 다 보겠다는 눈길, 당황하는 친구, 까탈스러워보이기 싫은 마음 이런 것들을 이겨내야 한 끼를 먹을 수 있다니.
'아무튼 비건'은 도움이 됐다. 일단 시작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책 초반에 반하고 그렇게 콩깎지가 씌인 상태로 마지막 장까지 쉬이 읽어내려 가는 것을 좋아한다. 다행히 이 책도 그랬다.
"이 책은 타자에 관한 책이다. 한 편의 시 같은, 철학자 레비나스의 말로 시작해보자.
참으로 사람다운 삶은
그냥 존재함의 차원에 만족하는 조용한 삶이 아니다.
사람답게 사는 삶은
타자에 눈뜨고 거듭 깨어나는 삶이다.
진심으로 동의한다. 나도 나의 관심이 나에게서 타자로 옮겨갈 때 진짜 삶이 시작된다고 믿는다. 타자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가 되는 순간 타자는 더 이상 타자가 아니며, 대신 우리라는 신기한 집합이 탄생한다."
"이 책은 타자에 관한 책이다." 이게 책의 첫 문장이라니 반할 수밖에.
무언가 타자화되면 그것은 나와 무관하다. 사람과 동물은 다르고, 반려동물과 가축은 다르고, 우리집 강아지와 보신탕은 다르다. 타자화하면 편하다. 다르니까 다르게 대해도 되고, 남이니까 관심 끄면 된다. 더군다나 자본주의와 과학기술로 꽃피운 세련된 문명 아닌가. 타자의 고통은 보이지 않는다. 소와 돼지가 어떻게 사육되는지 알고는 있지만 보이지 않는다. 도축의 현장을 우리는 볼 필요가 없다. 깔끔하게 포장된 고기 덩어리가 있을 뿐이다. 이 덩어리가 생명이었던 적을 우리는 본 적이 없다(보지 않는다). 동물을 타자화하는 삶은 사람을 타자화하는 삶 만큼이나 의미도 없고 삭막하다.
어떤 이유로 타자가 더이상 타자가 아닐 때, 우리는 변한다. 고민은 잔뜩 늘어나고 생활은 불편해지지만 동시에 즐겁고 충만하다. 누룽이가 어느날 나에게 오고 세상 고양이들이 다 누룽이로 보일 때 내 인생이 재밌어진 것처럼.
이 책에서 두 번째로 좋았던 것은 '실전' 챕터였다. 특히 비건을 하고 싶지만 아직 실천하지 못하는 나에게. '실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소제목과 문구를 인용하여 정리해보았다.)
'실전'
1. 시작하기: 완벽주의를 버리고
'먼저 실현 가능한 목표를 세워보자. 처음부터 앞으로 평생 비건으로 살아야 한다는 부담을 갖고 시작할 필요는 없다. 딱 한 달만 해보자, 해보고 좋으면 계속하자, 라고 가볍게 시작하자.'
ex.
- 고기 없는 주말
- 내 돈 주고 사 먹지는 말기 혹은 몰래 하기
- '66퍼센트' 비건 (매일 세끼 중 두 끼를 채식으로 하는 방법)
- 페스코 베지테리언 (생선과 해산물은 먹는 채식)
- 락토-오보 베지테리언 (달걀과 유제품을 먹는 채식)
'목표는 구체적일수록 좋다. 모호하게 '덜 먹기, 적당히 먹기'란 말은 처음엔 듣기도 부담없고 문턱이 낮아 편한 듯하지만, 그만큼 아무 기준이 없어 결국 지켜지지 않는다.'
2. 유지하기
- 팁은 인터넷에 ex. vegedoctor.org, 월간 '비건(Begun)'
- 혼자가 아니라 함께 ex. 채식공감
- 맛을 공감각적으로 즐기며
'모르는 사람들은 채식주의자들을 금욕주의자로 생각한다. 그런데 많은 비건들이 비건을 하면서 비로소 음식의 진짜 맛을 알기 시작했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몇몇 나라를 제외하고는 아직 비건 식당이 많지 않기 때문에, 비건을 결심하면 직접 해 먹어야 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자연히 재료에도 신경을 쓰게 되고, 그러다 보면 원재료의 맛을 더 잘 알게 되면서 전체적으로 만족도가 높은 식사를 하게 된다.'
3. 비건답게 입기
- 모피, 가죽, 양모와 패딩, 각종 인조/모조 제품들 (이것들의 생산과정이나 그 폐해에 대한 설명들이다)
4. 초대를 받았을 때
'번거롭더라도 초대를 한 사람에게 미리 알리는 것이 좋다. 예의를 갖추어서 말하면 실례가 되지 않는다. 초대한 쪽에서 너무 준비가 안 되어 있거나 당황해하는 것으로 판단되면, '포트럭(potluck: 각자 조금씩 음식을 준비해 같이 먹는 방식)'을 제안해서 상대방의 부담을 덜어주고, 맛있는 비건 음식을 경험하게 해주는 방법도 있다.'
5. 불편한지 물어볼 때
'배려심 많은 친구가 식당에서 물어본다. "혹시 내가 육식하는 걸 보는 것도 불편해?" 내 몸의 건강 때문에만 비건을 하고 있다면 대답은 쉽지만, 고통받는 동물들이나 환경 때문에도 하고 있다면 대답하기 어렵다.'
(이 부분에서 저자의 대답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인용하지 않았다. 각자의 대답이 필요할 듯)
그리고 그 다음 챕터인 '반응들'도 좋다. 이 부분이야말로 이 책에서 돋보이는 부분이다. 비건을 공격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반응들에 대해서 저자 김한민이 대답하는 부분이다. 그는 단순명쾌하다. 아래 반응들만 추려보았다. 책을 읽기 전에 각자 받아쳐보자.
반응들
"동물을 사랑하면서도 먹을 수 있어"
"비건은 너무 극단적이고 과격해"
"채식은 어쩌다 하는 정도면 충분하지"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들이 많다고"
"동물들도 동물을 먹잖아"
"인간은 원래 육식이다"
"채식만 해서는 건강할 수 없다"
"채식을 하면 건강할 순 있어도, 운동 능력은 떨어진다"
"단백질은 어디서 구하냐?"
"어린이나 노인에게는 위험하다"
"비건은 비싸"
"비건은 잠깐의 유행일 뿐이야"
"치즈는 왜 문제인가?"
"우유는 건강에 좋다"
"생산과 해산물은 문제없다"
"'B12'는 어떻게 하나"
"생선을 먹고 살아야 하는 에스키모는 어쩌란 말이냐"
"육식은 전통이고 문화이므로 바꿀 수 없다"
"인간은 동물의 주인이고, 동물보다 우월하므로 마음대로 해도 돼. 동물은 우리가 쓰라고 존재하거든"
"비건이 되면 그 많은 동물들은 어디로 갈 거냐"
"모든 비건이 되면 축산업계 종사자들은 뭘 먹고 사나"
"식물은 생명 아닌가"
"비건들이 말하는 동물의 고통은 인간 중심적이고 의인화된 거야"
"풀어서 기르는 닭, 풀 먹인 소는 문제없다"
"평소엔 그렇다 치고 축제나 경사 때 먹는 게 무슨 문제냐"
"백 퍼센트 비건은 하기도 어렵고 어차피 세상도 완벽하게 비건이 되지 못할 텐데, 해서 뭐하나"
"무인도에 갇혀도 안 먹을 거냐"
"내가 아는 채식주의자는 건강이 안 좋고, 육식을 즐기는 지인은 건강하다"
"논리는 알겠는데 어쨌든 맛있어서 못 관둬"
"환경주의자도 육식을 즐길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정보들' 챕터도 좋다. 볼 만한 다큐, 잡지, 웹사이트, 책, 앱과 커뮤니티, 단체 등을 소개한다. 깨알갔다. '아무튼, 비건'은 '타인에 관한 책'-무겁지 않은 철학서로 시작하지만 결국은 실전서다. 책을 덮을 때는 다시 앞날개를 펴서 저자의 이력을 확인하게 되는데, 책의 고민과 대답이 구체적이고 생생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