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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해 Jul 30. 2016

Liv.

 스위스에 존재하는 한 낭만적인 호텔. 알프스 산맥 중턱에 아름답게 자리잡고 있는 이곳은,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휴식을 취하고 치료를 받으러 찾아오는 곳이다. 은퇴한 오케스트라 지휘자, 유명 영화배우, 평화로운 곳에서 마지막을 보내고 싶은 노부부, 줄줄이 제 자식들을 데려온 부유한 인간들까지, 다양하다. 그리고 그곳에 존재하는 작은 규모의 재즈 바, 한 여인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나이는 이십 대 중 후반, 가벼운 노란색 원피스를 고 검은 바탕의 머플러를 머리에 리본처럼 묶은 여자였다. 시원한 음색, 어딘가 간절한 표정으로 노래를 부르는 그녀로부터 멀어진 시야는,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는 한 남자의 뒷모습을 비추고서야 비로소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녀의 노래가 끝나고 나오는 박수. 그 남자도 그녀에게 박수를 보낸다. 열정적이지는 않은 형식적인 박수, 그러나 그녀에게 무언의 시선만을 보낸다거나 무관심을 표출하는 건 아니었다.


 그녀의 노래가 끝나고 잔잔하게 흐르는 재즈음악. 여자는 무대에서 내려오고, 남자는 여자에게 다가간다. 매무새를 정리하고 목을 축이고 있는 여자에게 남자는 자연스럽게 다가가 말을 건다.

 "노래 잘 들었어요."


 "아! 감사합니다."


 "... 직업이 가수이신 거죠?"


 "네, 가수예요 아직 뭐 유명하진 않지만."


 "......


 여자의 말을 마지막으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남자 때문에 여자는 무안함을 느꼈다. 무안함을 준 건 남자였지만, 자신의 노래를 칭찬해준 사람에게 어느정도의 호의와 인내심을 배풀고자 여자는 자신이 나서서 적막함을 깨고자 했다. 여자가 대화를 이어나간다.


 "여기는 휴향차 오신 거예요?"


 "네, 뭐 그런 이유도 있고요. 사실 저는 누구를 좀 만나러 왔어요.. 근데 제가 약속시간보다 너무 일찍 와버려서 할 게 조금 없네요."


 여자는 왠지 모르게 그 남자에 대한 불편함과 호기심을 동시에 느꼈다. 자신의 노래가 좋다고 말해준 사람이 그 남자가 처음이었기도 하고. 그것이 과한 친절이라고도 느껴졌기 때문이다.

남자가 말을 이어갔다.


 "지인이 오기 전까지 그쪽이랑 대화를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네, 좋아요."


 "여기 분이세요?"

 "네?"

 "스위스 사람이신가요?"

 "아아 아니에요. 전 노르웨이 사람이고, 어떻게 어떻게 노래부를 장소를 찾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거예요."


 "아아 그렇구나. 그런데 영어를 굉장히 잘 하시네요."

 "어렸을 때 캐나다랑 노르웨이를 번갈아 오가면서 살았거든요. 어머니가 캐나다 사람이에요."


 "상당히 자유롭게 살았을 거 같아요."

 "네?"


 "어렸을 때부터 많은 나라를 오가면서, 여러 언어를 배우고, 주기적으로 변하는 일상에서 살아오셨잖아요. 저는 그런 게 꿈이었어요."


다시 이어지는 적막 속, 재즈 음악만이 잔잔하게 흐른다. 여자가 말을 이어나간다.


 "딱히 그렇지도 않아요. 저는 원체 변화를 싫어했거든요. 지금이야 뭐 많이 적응이 돼서 이렇게 딴 나라에서 혼자 살아갈 수 있는 거지만, 원래의 저는 그러지 않았을 거예요."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


 "노래는 언제부터 부르셨어요?"

 "15살 때부터요. 영어 선생님을 할까 가수를 할까 고민을 하다가 가수를 택했어요. 아무리 봐도 저는 노래부르는 걸 가장 좋아하는 거 같거든요." (웃음)


*


 대화를 하는 동안 남자가 무엇보다 집중했던 건, 그녀의 진실된 이야기였다. 내세움이나 꾸밈 같은 게 전혀 없던 순수한 이야기. 거짓된 눈빛이나 몸짓 하나 없이 말이다. 아마 그녀의 이런 순수한 부분이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던 남자의 지인에 가장 적합하게 들어맞았을 지도 모른다. 이로서 남자는 한 가지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름이 뭐예요?" 남자가 물었다.

 "리, 그나저나 약속시간이 언제예요?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지인은 안 보이는 것 같네요."


 "사실 없어요."

 "네?"


 "약속 잡은 지인이요."


 "그냥 그쪽이랑 이야기해보고 싶어서 즉석에서 지어낸 거짓말이에요."


남자는 담담하다.


거짓말을 드러냈음에도 여자 또한 다를 것 없었다. 당황하거나 황당한 그런 감 없이, 그저 서글서글한 눈웃음으로 대답을 이어나갔다.


 "왜 거짓말을 하셨어요, 그냥 죽 이야기해도 되는데."

 "그러게요.." 남자는 옅은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웃음소리가 끝나갈 즈음 남자가 말을 꺼낸다.


 "제가 한 가지 부탁을 좀 드려도 될까요?"

 "무슨 부탁이요?"


 "영화에 한 번 출연해보시지 않겠어요?"



 원래의 저는 그러지 않았을 거예요, 여자가 했던 말. 남자는 되도록이면 이곳에 오래 머무를 예정이라며 천천히 고민해도 된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잔잔한듯 보였던 여자의 길 앞에, 격변의 시기가 태동하고 있었다.


*


 "그 미국인 만나고 온 거야?"

여자와 같이 공연을 하는 친구가 물었다.

 "조심해, 미국인들은 무조건 다 믿어선 안 돼. 가뜩이나 전쟁 끝나고 돈 되는 거라면 안 되는 일이라도 다 하고 다니는 놈들이라던데."

 "다 그런 건 아닐 거야." 여자 또한 깊이 고민하는 것 같았다.

 "여기는 왜 왔대?"

 "모르겠어."

 "그 출연한다는 영화는 어떤 영환데? 다른 배우는 누가 출연하고, 너는 비중이 어느정도 되는지. 뭐 이런 것도 다 말해줘?"


 "아니.."

 "무섭지?"

 "어?"


 "솔직히 무섭잖아 그 미국인."

 "무슨 소리야 넌 한 번도 본 적 없잖아."


(다시 바로 얼마 전 그 남자와의 대화로 돌아가서)


 "이 제안은 엄청 조심스럽게 꺼내는 거예요. 저는 상대방을 설득하지 못할 바엔 차라리 입을 다무는 성격이거든요."

 "솔직히 그쪽분을 열심히 설득한다고 해도 결정하는 건 제가 아니지만, 한가지 명확한 건 저는 그쪽 분을 보고, 이야기를 듣고 어떠한 강한 확신이 들었다는 거예요.


 원체 변화를 싫어하는게 자신임에도, 마음 한 구석에는 엄청난 변화를 갈구하고 있음을 여자는 알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가능성과 도전거리들이 넘쳐나는 세상이었다. 나는 왜 지레 겁을 먹고 늘 똑같은 하루만 보내고 있었는지.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장소를 찾아서가 아니라 사실은 소용돌이 치는 세상으로부터 이곳으로 피난을 온 건 아닐지. 여자는 고뇌했다. 그리고 두려워했다. 새로운 곳에 대한 낯섦과 호기심,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하는 의문. 남자는 이곳에 오래 머무를 예정이라 했지만, 여자의 고민은 머릿 속에서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


 울창한 나무들을 뒤로 하고 놓아진 산책로, 누구나 걸어도 기분 좋은 산책이 될 법한 길이다. 산책을 조금 하다가 중간에 나오는 한 낡은 오두막, 이곳은 산책을 하는 사람들이 중간에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쉬는 장소다. 오두막을 바로 앞에 두고 걸어오는 두 남녀, 어떠한 대화를 하고 있다.


 "어떻게 조금 정하셨어요?"

 "네 그런 거 같아요."

 "답이 나온 건 가요?"

 "네,"

 "대답을 듣기 전에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남자는 리브의 눈을 바라본다. 숨을 눈에 뜨이게 들이쉬고 내쉬더니, 곧이어 말을 꺼낸다.

 ...


 "변한다는 건 아주 큰 일이에요.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걸 리브씨도 아시잖아요. 주변 환경이 변하든, 나 자신이 변하든 어찌됐건 변화는 나 자신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 낮섦을 안겨주죠.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낮섦을 감당하기 가장 어려운 사람은 바로 자신일 거예요. 무언가 힘겨운 일, 귀찮은 일이 내 앞에 닥쳤을 때 많은 사람들은 다짐하죠. 이 일만 끝내놓는다면 이 시기만 버틴다면 나는 변할 수 있는 어떠한 일이라도 할 거야, 라고요. 하지만 막상 그 때가 다가온다면? 정작 안하게 돼요. 사람이란 게 그렇거든요. '그거? 분명 해봤자 뭐 이럴텐데', 자신의 일상을 합리화시키고, 함부로 미래를, 결과를 결정해버리죠. 하지만 일단 움직인 순간, 변화를 추구한 순간, 그 후에는, 그 후의 일은 아무도 몰라요. 리브씨가 걱정하는 '다시 이곳으로 올 수 있을까?' 그 고민에 대한 대답도 아무도 몰라요. 그저 행할 뿐이죠. 변화를 원하고 새로운 나를 원하니까. 부귀영화만이 존재한다고는 말씀드리지 못 해요. 그럼에도 제가 제한하는 이유는, 기회를 드리고 싶어서예요. 누군가에겐 정말로 간절한 기회를요."


 눈은 너무나도 투명했다. 너무나도 투명해서 눈 너머의 명확한 답을 알아낼 수 없을 정도였다. 대답은 오직 그녀만이 알고 있었겠지.




 저녁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야외로 나와 가운데 모닥불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자리를 잡아 앉는다. 저마다의 편안한 복장으로 혹은 식사를 할 때 입었던 정중한 차림새 그대로 옷을 갈아입고 휴식을 취한다. 사람들은 타닥타닥 타오르는 모닥불을 가운데 놓고 그 모닥불의 온기를 눈으로, 몸으로 쬐인다. 모닥불을 둘러싼 사람들 너머의 작은 무대 위로 한 여인이 올라선다. 간단한 검은색 드레스만 걸친 그녀는 다른 어떠한 멋도 내지 않았지만 기품있어 아름다워 보였다. 몇 가지 준비를 마치고 그녀는 노래를 부른다. 마치 말하듯이. 노인들은 나긋나긋 흐르는 노래를 자장가 삼아 그곳에서 잠을 취했고, 젊은이들은 저들끼리의 분위기에 심취해 새벽까지 낭만적인 대화를 이어나갔다.

 "새로 온 사람인가봐." 무리 중 한 명이 대화의 주제를 바꾼다.

 "누구?"

 "저기 저 가수, 검은색 드레스 입고 있는."

 "아아 그렇네."


 "그 전 사람은 어디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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