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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해 May 15. 2016

여행자


*


 "두부랑 당근, 밀가루, 그리고 또 뭐냐... 됐어, 이거면 충분해. 나머진 집에 있으니까 빨리 밖에 나가서 구해와. 돈은 이정도면 됐지? 모자라진 않을 거야. 또 동네 애들한테 휩쓸려서 엉뚱한 데로 새지 말고. 바로 갔다와."


누나가 동생에게 부름을 시킨다.


 "아! 맞다 반찬거리도 몇 개 골라와~ 네가 먹고 싶은 것만 가져오지 말고. 누나 뭐 좋아하는지 알지?"


동생은 부리나케 뛰어나간다. 이곳은 혼잡한 시장 골목 구석에 있는 옷가게. 누나는 가게를 보고 있고 동생은 저녁거리를 준비하러 나갔다. 열심히 휴대폰을 만지고 있는 누나,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았더니 채팅을 하고 있다. 평범한 친구는 아닌 듯 누나가 글을 읽고 답장하는 행동이 조금 더디다.

 "이게 무슨소리야?"

 "수정해주고 싶어도 무슨소리를 했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상대는 한국인. 영어를 배우고 싶다고 누나와 채팅을 하나보다. 영어로 메시지를 보내다가 안 되니까 여간 답답한지, 다시 한국말로 마구 메시지를 보낸다. 이럴 때마다 누나는 혼란스럽다. 아무튼 시끄러운 한국인과 이야기를 하고 있음엔 틀림없다.


그러던 와중, 가게 안으로 손님이 들어온다. 

 "어서오세요"

그는 누나에게 와서 가장 싼 반팔티가 얼마냐고 영어로 물어본다. 우리말이 아니라 영어를 쓰는 걸 보니 여행자인 것 같다. 동아시아인이고, 발음을 보아하니 한국인임을 누나는 예상한다. 맙소사, 또 한국인인가. 한국인으로 예상되는 그 여행자는 20대 후반, 머리를 지저분하게 길렀고, 수염은 밀지 않았으며 치아 배열이 불규칙적이었다. 배낭을 매고 있었고 푸른 빛이 도는 선글라스를 목 부분에 걸치고 있었다.

 "가장 싼 반팔티 있는 종류로 다 보여드릴까요?"

누나는 물었고, 여행자는 그래달라고 했다.


하나는 'pinang hill'이라 적혀있는 하늘색의 반팔티였고, 다른 하나는 오랜지 색깔 할리우드 로고를 달고 있는 보라색 반팔티였다. 여행자는 잠깐의 고민도 없이 파란색 티를 골랐다. 자신에게 맞는 사이즈를 가져간 뒤, 입고 나와 그 상태로 계산을 하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가게에서 나가려 했다. 누나는 나가는 여행자에게 혹시 한국인이냐고 서툰 한국말로 물었고, 여행자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반갑게 웃으며 그렇다고 했다.


"한국말은 어디서 배웠어요?" 라고 여행자가 묻자 누나는 요즘 한국인과 채팅을 하며 한국말을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여행자는 그 말을 듣고, 목 부분에 걸치고 있던 파란색 선글라스를 쓰더니 웃으면서 "같이 사진 한 번만 찍어도 될까요?" 라고 물었다.


여행자는 흡족한 표정으로 누나와 사진을 찍곤, 인사를 하면서 나갔다. "감사합니다!"


*


밖으로 나온 동생. 심부름을 하러 가진 않고, 시장을 돌아 입구를 가로질러 시내로 달려간다. 어디를 그렇게 급하게 달려가는지 쫓아가 보았다. 친구들을 만나러 간 것도 아니고, 오락실에 간 것도 아니었다. 영화관이었다. 90년대 홍콩영화들이 재개봉을 했다는 광고가 대문짝만하게 붙어있었고, 사람들은 바로바로 티켓을 사서 영화를 보러 들어가고 있었다. 동생은 심부름 값으로 받은 돈으로 영화표 한 장을 구입한 후 극장으로 들어갔다.


상영관 안에는 사람이 많았지만 주말 오후치고는 사람들이 적은 편이었다. 듬성듬성 빈 자리도 보였다. 동생은 맨 앞자리 티켓을 끊었지만, 중간에 위치한 구석탱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마 주인이 없는 자리일 거다. 관 내에는 여러 사람들이 있었다. 젊은 사람들, 커플들, 무리지어 온 중고등 학생들은 물론 혼자 보러온 아저씨들까지 있었다. 보통은 영화관에서 아저씨를 찾기는 힘들었는데 말이다. 동생처럼 어린 사람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됐다. 장국영의 얼굴이 나온다. 뚜벅뚜벅 한 극장 매표소 여직원에게 다가간다. 잠깐의 대화였지만, 아무래도 그 여직원은 장국영에게 반한 듯 보인다.

라디오의 음악을 틀어놓고 장국영이 맘보춤을 춘다. 그 때 영화를 보던 한 아저씨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혼잣말로 불평을 한다.

 "도대체 쌈박질은 언제 하는 거야 뭐 이딴 것만 나오고 있어."

아저씨는 불평하며 하염없이 콜라만 빨아댔지만,

동생은 영화의 한 장면 한 장면을 머릿속에 새로운 기억과 추억으로 쌓아갔다. 동생은 영화의 눅눅한 분위기와, 장국영의 슬픈 눈과, 화가 난 뒷모습을 오감으로 느끼고 있었다.


영화가 끝나고, 동생은 극장 밖으로 나왔다. 주황색 하늘에 드문드문 하얀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동생은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마쉰다. 이곳의 냄새다. 다시 동생은 부리나케 어디론가 뛰어간다.


인근에 있는 마트다. 누나가 시킨 신부름 목록을 잘 기억하고 있을진 모르겠다. 두부를 집어든다. 당근을 기억하고 집어들었다가 내려놓고, 대신 그 옆에 있던 감자를 집어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과자 한 봉지를 포함해서 영화를 보고 남은 돈으로 계산한다. 동생은 장을 본 비닐봉지를 들고 또 어디론가 부리나케 뛰어간다.


토스트 가게다. 장바구니엔 튀긴 멸치랑 칠리파디가 추가되어 있었다. 아마 이곳으로 오는 길에 부리나케 샀을 것이다. 동생은 햄 토스트 한 개를 주문했다. 이제 남은 돈은 없나 보다. 포장된 햄 토스트를 장바구니에 던져놓고 다시 동생은 어디론가 달린다.


*


한 남자와 영화관 직원이 싸우고 있다. 남자는 영화값을 환불해달라 주장하고 있었고, 매표소 여직원은 이미 상영이 끝난 영화이니 그럴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를 멀리서 지켜보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기다림을 재료로 하여 시간을 담아내고, 순간을 즐기는 예술가였다. 그 뛰어난 예술가에 의해, 그들의 언쟁은 하나의 피사체로 자리 잡히고, 직사각형의 프레임을 가득 채우면서, 작품의 테마가 되어가고 있었다. 완벽하게 구축된 그림을 보면서, 예술가는 셔터를 눌러 그 순간을 담아냈다.


예술가는 근처의 한 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여러 사람들이 다양한 물건들을 팔고 있었다. 게중 그 예술가는 악세사리를 팔고 있는 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알록달록 화려하고 소박한 색깔들이 천장으로부터 매달려 있었고, 그 안에서는 조그만 빛들이 은은하게 나오고 있었다. 가게 주인은 그 뒤에서 말 없이 부채질을 하고 있었고, 예술가는 그에게 사진 한 장만 찍어도 되냐고 물어보았다. 주인은 그러라고 했고, 그 다음 예술가가 사진을 찍기 위해 가장 먼저 살펴보았던 건 빛이었다.

좋지 않은 빛은 없다. 과한 빛도 없었으니 그 예술가는 바로 카메라를 꺼내들어 렌즈로 그 그림을 바라보았다. 주인의 얼굴은 천연색의 악세사리로 가려져 있었고, 예술가는 말 없이

그것을 바라보기만 했다.


끝내 그는 사진을 찍지 않았다. 카메라를 가방에 집어넣고, 눈으로 그 순간을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곧바로 주인에게 인사를 하고 나왔다. 예술가는 다시 시장 내에서 발걸음을 옮겼다. 본능적으로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시장 가장 구석에 있는 한 옷가게, 그는 그곳으로 들어갔다.


순간, 그는 바로 카메라를 꺼내들어 그 안에 있던 무언가를 찍었다. 어떠한 동의나 일말의 숙고 없이 말이다. 그것은 한 남매였다. 동생은 과자를 입에 물고 있었고, 천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누나는 토스트를 먹고 있었고 왠지 모를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갑자기 카메라를 들이댔음에도, 남매의 표정에는 놀람이나 당혹감이 보이지 않았다. 미인을 묘사하는 그 어떠한 방법으로도 이 남매를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만큼, 순간의 사진은 완벽했다. 순전히 장인의 실력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롯이 피사체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예술가는 그 남매를 멍하니 바라보더니, 정신을 차리고 사과부터 먼저 했다. 갑자기, 동의 없이 찍어서 죄송하다고. 그는 이어서 자기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자신은 일본에서 온 사진가이며 지금은 전 세계를 여행하면서 사진을 찍고 있다고, 이렇게 간략하게 말이다.

 "이 사진을 제가 소장할 수 있을까요? 물론 원하지 않으시다면 바로 지우겠습니다." 예술가는 남매에게 물었다.


남매는 그저 멀거니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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