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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터프쿠키 Jun 22. 2016

일탈

지난 한 주는 내 직업 생활의 일탈 같은 시간이었다.


눈 떠지면 일어나서 방구석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다 졸리면 잠드는 나의 일상과 정 반대로, 매일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서, 정해진 옷을 입고 수많은 사람들을 대면하고 말까지 거는 일을 했으니까!


지난주 나는 모 백화점에서 일주일 동안 열린 행사에 참여했다. 사실 나와는 상관없는 남자친구의 일인데 어쩌다 보니 사정이 그렇게 됐다. 관계자들과 미팅을 하고 수시로 연락을 하며 세부 사항을 조율하고, 행사장을 꾸미기 위해 지하 검품장부터 플로어까지 물품을 날라가며 손가락이 아닌 팔다리를 움직였다. 판매 아르바이트를 한 명만 쓴 관계로 그 아이의 점심시간과 쉬는 시간을 챙겨주기 위해 매일 정해진 시간에 나가서 한 시간씩 교대를 해주며 판매도 해보았다(내가 올린 실적은 1원도 없다 또르르). 


알바몬에 구인공고를 올렸는데 원래 이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원자들이 꽤 많았다. 그 와중에 누굴 뽑아야 할지 몰라 무려 면접 날짜를 통지해놓았는데, 지원자 대부분이 면접일이 되기 전에 다른 일을 하게 됐다고 연락이 왔다. 내가 단기 아르바이트의 생태계를 잘 모르고 너무 여유를 부리며 일정을 잡았었나 보다. 그래서 수많았던 지원자들 중에 결국 두 명만 남아서 면접을 보게 되었다.

사실 내가 면접의 대상이 된 적은 있지만 누군가를 선택하는 주체가 된 건 처음이었다. 일주일 단기 아르바이트이기 때문에 그냥 인상이나 직접 보고 싶었던 거지, 사람을 오라 가라 하면서 물어볼 만한 대단한 질문거리도 없었다. 약속한 시간에 카페에 앉아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나 하는 후회와 긴장 속에 지원자를 기다렸다.


첫 번째 지원자가 왔다. 

'아 이렇게 생기셨구나.'

이제 내 궁금증은 전부 해소됐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럴 순 없다.

인사를 하고 앉자마자 말문이 막혔다. 무슨 공부를 하시는지, 아르바이트 경력은 있으신지, 시간 약속은 잘 지키는지 등등 궁금하지도 않은 질문을 생각나는 대로 던졌다. 시간 약속을 잘 지키냐니, 설령 지각을 밥 먹듯 하는 사람이라고 한들 그 자리에서 "아니요 맨날 늦어요"라고 대답하기라도 하겠나. 이런 무의미한 질문들로 어쭙잖게 대화를 이어가다가 정말 더 이상은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궁금한 게 있는 건 아니고 인상이나 보고 싶었어요."

결국 지원자에게 이런 프로페셔널하지 못한 고백을 하고 말았다.

그런 나에게 이 아이는 일어나면서 악수를 청하고(!) "금요일 아침에 뵐게요"라고 인사하며 여유롭게 자리를 떴다. 난 너 뽑는다고 한 적 없는데...

먼저 악수를 권하다니. 그런 건 스물두 살의 나는 말할 것도 없고 서른한 살이나 된 지금의 나도 선뜻하지 못하는 일이다. 스물두 살의 나는, '친구들이랑 어울리는 연습을 해야 한다'는 엄마와 언니의 진지한 고민 끝에 학교를 휴학하고 고등학교처럼 하루 종일 수업하는 영어학원에 강제로 보내졌던 찌질이였는데(그 학원에서 인생 친구 한 명 사귀기에 성공했다) 이렇게 능숙하게 사람을 상대하는 스물두 살도 있구나. 

떠나는 이 친구에게 면접비 명목으로 오천 원이 든 봉투를 건네주었다. 이건 남자친구도 모르는 일이다. 사실 남자친구의 회사는 그런 돈까지 챙겨줄 만한 규모는 아니다. 나도 면접비를 받아본 건 대기업에서도 공채 면접을 봤을 때뿐이었다(물론 액수는 더 컸다). 왜 굳이 남의 일에 사비를 들여가며 면접비를 줬는지는 다음에 다시 얘기해야겠다.


첫 번째 지원자의 말대로 우리는 금요일 아침에 백화점에서 만나게 되었다. 행사가 시작되었다. 준비는 바빴지만 막상 행사가 시작되고 나서는 점심시간에 가서 교대를 해주는 것 외에는 특별히 신경 쓸 일이 없었다. 나는 점심시간에 가서 한 시간 동안 대신 근무를 서 주고, 근처 커피숍에서 일을 하다가 오후에 다시 가서 쉬는 시간으로 30분 정도 대신 근무를 해주는 게 일이었다. 첫째 날에는 전 날 준비를 하면서 쌓인 피로와 스트레스 탓에 점심시간에만 한 번 교대를 해주고 쉬는 시간은 주지 못한 채 집으로 와버렸다. 주말이 지나고는 이 친구가 주변 판매직원 분들과 친해져서 잠시 매대를 맡겨놓고 화장실 정도는 다녀올 수 있다며 쉬는 시간 교대가 필요 없다고 나를 흔쾌히 퇴근시켜 주었다! 


내가 고객으로 지나다닐 때에는 몰랐는데, 판매를 위해 한 자리에 계속 서서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온갖 인간군상이 보인다. 점심시간에 군것질 거리를 찾는 직장인들, 코엑스 박람회에 왔다가 주변을 구경하러 온 외국인들, 유모차를 끌고 온 젊은 엄마들(중에는 고등학교 동창도 있었다), 심심한 아저씨, 방해받기 싫은 아가씨 등등. 행여라도 말을 걸까 봐 '나 살 거 없고 관심 없으니까 쳐다보지도 마'라고 온몸으로 외치며 매대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다. 우연찮게 우리 동네에 있는 백화점이었기 때문에 마치 지금 판매를 위해 서 있는 자리가 아니라 매대를 구경하며 돌아다니는 사람들 속에 진짜 내가 있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관심도 없어 보이는 사람들에게 제품을 보고 가시라고 말을 걸고, 그런 나를 무시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구시렁거리고. 겨우 한 시간 서있는데 허리가 그렇게 아플 수 없었다. 교대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서 다시 키보드를 두드리며 내 일을 하고 있으면, 그래 내가 있을 곳은 이 곳이다. 나에게는 방구석에서 키보드 두드리는 모습이 잘 어울린다. 이런 일탈스러운 일이 가끔 있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한 번에 하루 이틀 정도면 충분한 것 같다. 일주일은 좀 긴 시간이었어. 


일탈이 끝난 뒤 돌아온 주말. 운동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있는 다른 백화점에서 신관을 연 것이 눈에 들어왔다. 생각 없이 구경을 하다 보니 친절하게 다가와서 필요한 게 있는지 묻는 점원이 예전과 다르게 보인다. 나는 내가 말 걸면 대충 시선을 피해가며 돌아서는 사람들이 참 야속했는데, 나도 똑같은 일을 하게 된다니 속이 상했다. 그렇다고 구경은 할 수 있어도 그들을 기분 좋게 해주겠다고 필요도 없는 걸 덥석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살 것도 없으면서 구경을 하겠다고 백화점에 들어오면 나 자신을 원망하며 길을 나섰다. 그들은 나 같은 뜨내기가 아니고 프로니까 괜찮을 거라고 합리화하며. 원래도 잘 다니는 건 아니지만, 당분간은 백화점 가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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